이해하기 어려운 약자를 향한 조롱
이해하기 어려운 약자를 향한 조롱
  • 장은영 한양대구리병원 교수
  • 승인 2014.09.26 15: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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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호모 조롱투스’라는 용어를 접한 적이 있다. 세월호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조롱과 비난을 기술하면서 사용된 표현이라고 한다. 아마 필자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최근의 조롱행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나 보다.

 

타인에 대한 조롱이나 비난은 인류와 함께 존재해왔다.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야유하기도 했고 공연이나 예술의 형태로 해학과 풍자를 담아 여럿이 공유하기도 했다. 또는 쉽게 드러나지 않을 표식이나 기호로 남몰래 표현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 대부분은 ‘가진 자’들이 대상이었다.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는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려는 사람, 타인을 착취하고 괴롭히는 사람 등이 대표적인 조롱과 야유의 대상이었다.

이런 점에서 유가족을 향한 최근의 조롱행위들은 낯설다. 간접적이지도 않고 상징이나 기호도 사용하지 않으며 강자라고 보기 어려운 대상을 향하고 있다.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려는 사람, 맞서 싸울 기력이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사람을 비웃고 조롱하는 것이 가능한가? 돌이켜보면 이러한 의문을 가져본 적도 없는 것 같다. 고통을 겪는 사람을 보면 공감하거나 혹은 동정이라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리라.

물론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 피해자나 희생자를 비웃거나 조롱하는 경우는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집단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약자나 희생자를 조롱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최근 우리사회가 목격한 조롱은 심리학의 역사에서 다뤄져 온 요소를 일부 지니고 있다.

첫째, 공격성의 표출이다. 심리학에서는 공격성을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타인을 해하려는 물리적 또는 언어적 행위로 정의한다. 단식하는 유가족을 향해 언어나 퍼포먼스를 통해 감정을 다치게 하는 것은 공격의 한 형태에 해당한다.

둘째, 공격성이 표출되는 원인은 다양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원인으로 누적된 분노가 꼽힌다. 분노나 좌절감이 누적되면 이를 어느 순간 표출할 수밖에 없다.

셋째, 속죄양이 필요할 때가 있다. 강력한 상대방은 자신의 공격을 무마시키기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줄 수 없다. 따라서 약자나 소수자가 표적이 되고는 한다. 911 사태 직후 일부 시민들이 아랍계 상점을 공격한 예가 이를 뒷받침한다.

넷째, 지속적인 집단구분 현상이다. 어떤 기준을 사용하든 집단이 나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보다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해 비호의적이 된다. 사회경제적 지표에 의해 지위나 계층을 구분하는 우리의 습관은 집단 간 갈등의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다.

우리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조롱행위에 동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위에서 열거한 심리사회적 요인들로 개인의 행동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각자 지닌 분노, 공격성, 공감능력, 가치관, 지향, 상황적 여건 등 영향을 미칠만한 요소들은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이건 약자를 향한 조롱이 정당화될 수 없는 점은 분명하다. 다만 우리를 당황시킨 조롱 퍼포먼스도 우리가 속한 사회가 만들어낸 산물은 아닌지, 현재 우리사회에서 강자에 대한 조롱을 표현할 수 있는 통로가 차단돼 있음을 알려주는 반증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 칼럼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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