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한계는 마음을 시험한다
몸의 한계는 마음을 시험한다
  • 강용혁 분당 마음자리 한의원장
  • 승인 2012.05.17 1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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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몸과 마음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한쪽이 쌩쌩해도 다른쪽이 무너지면 이내 수레 전체가 망가진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는 곧잘 몸의 한계를 망각한다. 

어버이날을 맞아 보약을 지으러 온 팔순 할머니.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남편 병간호로 몸이 많이 축났다. 부쩍 눈이 잘 안 보이더니, 기억력도 현저히 떨어졌다. 마른 편인데도 1년 사이 5㎏이나 더 감소했다. 혀이끼는 메말랐고 혀는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딸은 “좀처럼 화내는 걸 본 적 없는데, 요즘은 화도 자주 내시고 부쩍 우울해한다”며 걱정한다. 자식들이 얼마 전 아버지를 위해 비싼 안마치료기를 선물했을 때도 환자는 버럭 화부터 냈다. 자식들은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황당해했다. 그러나 아픈 아버지 생각만 했지, 간병에 지쳐버린 어머니에겐 어떤 부담이 될지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20~30대도 출산 후엔 산후조리원과 도우미가 필요하다. 몸이 힘들면 어렵게 가진 내 아기조차도 전혀 예쁘지 않고 산후우울증에 빠진다. 그런데 팔순 노모가 중환자 야간 간병을 1년 넘게 혼자 맡아온 것이다. 치료기는 선물이 아니라 간병 일거리를 늘리는 짐이다.

몸이 한계에 다다르면 결국 마음도 버티기 어렵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사랑하는 남편이기에 1년 내내 외출 한 번 없이, 곁에서 기저귀를 갈며 항상 밤을 함께 지낸 것이다.

그러나 몸의 한계는 결국 마음의 인내를 시험한다. 그래서 ‘어서 빨리 끝나버렸으면…’ 하는 모진 마음도 든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몸의 한계다. 마음을 모진 데까지 몰아세우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몸이 한계에 다다르지 않게 해야 한다. 간병환경의 변화가 절실하다.

그러나 환자는 “교수와 의사인 아들들이 요양원이나 병원으로 모시는 걸 극구 반대한다”며 “조금만 더 참으라고 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언뜻 지극한 효심처럼 보이지만,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이 더 우선이다.

또 요양원에 모셨다는 양심의 가책을 피하려는 것뿐이다. 대신 팔순 노모의 어깨 위에 모든 짐을 올려놓는 것이다.

몸이 가야 마음도 간다. 환자는 이미 몸의 한계를 넘어섰다. 그러나 인간의 머리는 항상 무한을 꿈꾼다. 그래서 자신의 몸이 유한하다는 평범한 사실조차 곧잘 잊고는 한다.

일례로, 경기 후반 숨을 헐떡이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권투선수에게 “왜 저걸 한방에 KO 못 시키나”라며 “정신력 문제”라고 쉽게 힐난한다.

그러나 직접 한 번만 뛰어보면 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차라리 상대가 나를 KO시켜 이 지긋지긋한 상황에서 빨리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때로는 머리가 아닌 몸이 더 정확하다. 머리는 양심과 체면으로 거짓을 꾸며내도, 몸은 거짓말을 하기 힘들다. 노모는 신경쇠약에 화병 양상까지 나타났다. 보약을 먹으며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자식들의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노모가 먼저 큰 탈이 날지 모른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1주일에 한 번씩만 직접 병간호하길 제안했다. 노모는 따로 잠을 자고 낮엔 외출하도록 했다. 직접 모셔보면 자식들도 금방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몸으로 직접 한계를 겪어봐야 머리가 꾸며낸 것이 환상임을 안다.

군자는 꼭 해야만 하는 것도, 하면 절대 안되는 것도 없다고 했다. 다만 의(義)를 따를 뿐이다. 문제는 집이냐, 요양원이냐가 아니다. 얼마나 건강한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병자와 나눌 수 있는가이다.

노모에게만 짐 지우며 요양원이나 병원 간병을 현대판 고려장쯤으로 여기는 건 모순이다. 지친 노모의 몸을 한계로 몰아붙여, 남편에 대한 사랑마저 시험대에 올리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강용혁 분당 마음자리 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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