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와 자기애의 충돌
모성애와 자기애의 충돌
  • 강용혁 분당 마음자리한의원장
  • 승인 2012.06.28 2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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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성애는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는 최고의 헌신이다. 그러나 모든 여성에게 저절로 주어지는 미덕은 아니다. 윤리와 양심이 포장한 껍데기를 벗겨내야 진정한 모성애를 향한 출발점에 서게 된다. 

산후우울증으로 내원한 30대 여성. 출산 후 우울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반복된다. 이젠 설거지를 하다가도 갑자기 숨이 콱 막혀 죽을 것 같다.

자상하고 가정적인 남편에게도 이유없이 화를 퍼붓는다. 환자는 “왜 아이를 낳았는가라는 생각뿐”이라며 “기저귀를 갈다가도 내가 날카로운 걸로 아기를 해칠 것 같아 섬뜩하다”고 말한다. 홀로 멍하니 창밖을 보면 극단적인 생각까지 든다. 환자는 모든 게 시댁과의 갈등, 밤에 깨어 우는 예민한 아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언뜻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환자는 “남편이 집에 오자마자 아기부터 챙기고 예뻐하는 모습에 이상하게 화가 난다”고 말했다. 내 아이를 예뻐하는데 왜 화가 날까.

모성애보다는 자기애가 강하기 때문이다. 출산 후 남편의 관심을 아이에게 뺏겼다는 무의식적 불안감이다. 결국 ‘아이가 없어져버렸으면…’하는 극단적 욕구로 치닫는다.

선뜻 동의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인간의 모성애가 얼마나 강한데 설마 자기 자식을 두고 그럴까 싶다. 그러나 관심 끌기 위해 부모가 보지 않을 때 동생을 밟기도 하는 게 인간이다. 형제애, 부성애보다 훨씬 강한 게 모성애이지만, 자기애보다는 못한 게 인간 본성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잔혹한 실험도 그 예다. 엄마와 아기를 바닥이 가열되는 프라이팬 룸에 가두고 천천히 온도를 올렸다. 모든 엄마들이 처음에는 아기를 껴안고 고통을 감내했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아기를 밟고 올라섰다.

일본 731부대 실험도 마찬가지다. 엄마와 아기를 좁은 공간에 가두고 물을 채워나가자, 처음에는 머리 끝까지 차오르도록 아기를 높이 들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엄마는 이내 아기를 발 밑으로 내려 딛고 서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이처럼 둘 중 하나만 살 수 있는 극단적 상황에선 모성애보다 자기 자신이 우선이다.

결국 환자의 무의식도 ‘아이가 없었더라면…’이라고 결론 내린다. 다만, 입밖으로 꺼낼 수도 없고 스스로도 용납하기 어렵다. 그래서 부정하고 억압하게 되고, 그 틈을 비집고 변형된 형태로 치밀어오르는 것이 산후우울증 증상들이다.

다만, 이 환자가 유독 심한 것은 친정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이다. 오빠만 위하고 자신은 늘 차갑게 대했던 아버지에 대한 애정결핍이다. 어릴 적 각인된 부성의 결핍을 자신도 모르게 남편에게서 채우려 한다.

이는 생존욕만큼이나 강하고 평생 지속된다. 배우자 선택 기준도 ‘아버지와 닮지 않은 자상한 남자’가 된다. 그런 갈증의 충족을 갑자기 방해하는 걸림돌이 바로 아기였던 것이다.

이제마는 “한 인간의 내면에 인욕(人慾)과 도심(道心)은 공존하며, 이를 밝게 드러내어 구분하는 것(明而辨之)이 도심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환자는 자신의 마음 안에 ‘자기애’와 ‘모성애’라는 상반된 두 욕구가 싸우고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아기가 단 한 번도 예뻐 보인 적이 없어 돌잔치도 하기 싫었다”고 말하던 환자는, 이 두 가지를 구분한 뒤로 우울증을 빠르게 극복해 나갔다.

아이만 낳으면 모성애가 저절로 충만될 만큼 인간은 아름답지 않다. 후천적 노력으로 부단히 채워져야 한다. 오히려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구 충족에 자식을 이용하기 쉽다.

엄마들은 곧잘 자식을 향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속에 숨겨진 지독한 이기심과 착각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모성은 실현된다.

<강용혁 분당 마음자리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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