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 춘추]‘나 때문이야’와 갈등 치유
[한방 춘추]‘나 때문이야’와 갈등 치유
  • 강용혁 분당 마음자리한의원장
  • 승인 2013.01.18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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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따로 떨어져 평행선만 달리는 건 아니다. 언제나 같은 곳을 향하고, 모든 짐을 함께 나눠 지며, 하나의 축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부부 한쪽의 문제만 놓고 책임공방을 벌이는 건 무의미할 때가 많다.

부부갈등으로 내원한 60대 노부부. 남편은 편두통, 아내는 화병으로 내원했다. 수개월 전부터 시작된 할아버지의 주사 때문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에 만취해 며느리가 보는 앞에서도 욕을 한다.

처음에는 사소한 부부싸움이었다. 적금통장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무시당한 게 발단이었다. 그 뒤로 술만 취하면 “바람이 나서 돈을 빼돌렸느냐”며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또 ‘꿈에서 바람을 피웠다’며 할머니를 들들 볶았다. 점점 심해져 이제는 진통제며 감기약을 함께 복용하고 몽롱한 상태에서 방안에다 대소변을 지린다. 다음날 깨어나면 할아버지는 전혀 기억을 못한다.

황당한 일이 반복되자 가족들이 미칠 노릇이다. 아들은 “치매가 온 거냐”며 곤혹스러워했지만 술버릇은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그동안 정신과와 심리상담소도 다녔다. 할머니는 “의사도 내 화병은 모든 게 할아버지 때문이라 했다”면서 “할아버지가 먼저 치료받아야 내 병도 낫는데 한 번 가고는 다시는 안 간다”면서 원망했다.

할머니와 아들 내외의 요구는 분명했다. 정신과는 다시는 안 가려 하니 한의원에서 어떻게든 할아버지를 설득하고 치료해달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할아버지가 모든 문제의 시작이자 끝이란 관점이다. 여기에 의사라는 원군까지 동원해 승복시키려는 것이다. 식사도 제대로 못한다는 할머니는 “할아버지 잘못인데, 내가 왜 먼저 치료를 받느냐”며 화병 치료도 거부했다.

그러나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 가족과 의사까지도 모두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상황에서 누군들 치료를 순순히 받아들일까. 그보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라는 원인 분석이 먼저다.

시쳇말로 방바닥에 ×칠을 하는 것은 극단적 분노의 표현이다. 술기운을 빌렸지만 할아버지의 무의식이 의도한 결과다. 그렇다면 왜 그런 분노가 쌓였을까. 할아버지처럼 소음인은 자존심이 위협받을 때 분노나 회피심리가 강해진다. 작은 가게지만 평생 열심히 일해 일가족을 부양했다는 자존심 하나로 버텨왔다. 그런데, 할머니는 은근히 남과 비교하거나, ‘그깟 돈 얼마나 벌어왔다고…’라며 무시했다.

통장을 통해 약해져가는 존재감을 확인하려던 할아버지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게다가 아들은 아버지의 행동만 보고 더욱 코너로 몰아붙였다. 작은 부부싸움으로 끝날 일이었다. 그러나 ‘가족조차 알아주지 않는다’는 억압된 분노와 고립감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자존심 회복이 우선이다. 아들 내외에게 술을 드시러 나가려 하면 속 버리지 않도록 좋은 안주로 집에서 따뜻하게 대접할 것을 주문했다. 얼마 뒤 아들은 “신기하게도 집에선 만취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실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두통에는 보약을 처방했고, 할아버지가 좋아지자 할머니도 치료를 받겠다고 나섰다.

노벨상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얼마나 많은 구름이 인간이 만들어낸 국경선 위를 유유히 흘러가는가. 얼마나 많은 사막의 모래 알갱이들이 한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흩날리고 있는가’라고 노래했다.

구름과 모래가 그러할진대, 형체조차 없는 마음의 씨앗이 오고감에 너와 나의 경계가 있을까. 특히 살 비비고 사는 사이라면 말이다. ‘너 때문이야’에서 돌고 돌아 ‘나 때문이야’를 받아들일 때 갈등은 비로소 치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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