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기병 라젠카, 의료과실 피해자를 구해줘요!
영혼기병 라젠카, 의료과실 피해자를 구해줘요!
  • 신민우 기자 (smw@k-health.com)
  • 승인 2016.02.1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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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종족 ‘아트만’과의 전쟁에서 크고 아름다운 고대로봇 ‘가이런’은 인류의 희망으로 떠오릅니다.

[신민우 기자의 ‘불타는 금요일 뜨거운 보건이슈’] 22세기 초 핵전쟁으로 피폐해진 지구. 간신히 살아남아 도시국가 ‘세토스’를 세운 인류에게 외계종족 ‘아트만’이 지구의 패권을 차지하려 공세를 퍼붓습니다. 핵전쟁의 여파에서도 살아남은 인간들은 다시 생존위협을 느끼게 되죠. 이때 주인공 아틴이 고대로봇 ‘가이런’을 깨우며 인류의 마지막 희망으로 떠오릅니다. 고(故) 신해철 씨가 작곡한 ‘라젠카, 세이브 어스(Lazenca, Save Us)’로 유명한 국산만화영화 ‘영혼기병 라젠카’ 이야기입니다.

만화 속에서는 이 크고 아름다운 로봇이 사람들을 든든히 지켜줍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요? 의료사고 피해자를 지켜주는 이는 없습니다. 권력이 돼버린 병원 앞에서 개인은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힘든 현실입니다. 이번 주 주제는 의료사고분쟁입니다.

우리나라 전설적인 록가수 고(故) 신해철 씨의 팬들에게 있어 2014년 10월은 슬픔 가득한 시간일 겁니다. 별명인 ‘마왕’처럼 영원할 것 같던 그의 부고(訃告)는 크나큰 충격적이었으니까요. 그가 장협착증수술을 받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자 온갖 루머가 떠돌았습니다. 이 가운데 의료과실에 이목이 집중되면서 화장(火葬)을 준비하던 유가족은 송파경찰서에 고소장을 접수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했죠.

그 결과 경악할 만한 진실이 드러납니다. 부검결과 소장과 심낭에서 0.3cm의 천공이 발견됐고 이는 환자동의 없이 이뤄진 위축소술로 인한 것이었으니까요. 이로 인해 복막염이 일어났지만 병원이 제대로 조치하지 않았고 결국 목숨까지 잃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의료과실로 인해 신해철 씨가 사망하게 된 거죠. 현재 유가족은 불구속기소된 집도의와 법적공방을 벌이고 있습니다.

고(故) 신해철 씨의 사망으로 인해 의료과실에 대한 공론화가 이뤄지게 됐습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사건은 의료과실과 피해자들의 고통을 공론화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물론 의사도 신이 아닌 만큼 진료나 수술 중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일이 알게 모르게 많이 일어난다는 점이죠. 의료시민단체나 양심 있는 의료인들은 “보통 사망, 심각한 후유증에 가려져 주목받지 못하지만 실수로 인한 자잘한 의료과실이 상당히 많다”고 지적하니까요.

더군다나 자조섞인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신해철 씨는 다행히 유명인이니 국민적인 분노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지만 일반인은 이만큼 대처할 수 없다”는 거죠. 의료과실로 인한 소송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환자가 입은 의료피해가 병원진료행위로 인해 발생했다는 인과관계를 입증할 수 있는가’입니다. 쉽게 말해 ‘정말 진료 때문에 환자피해가 발생했냐’는 것을 밝혀야 하죠.

이를 규명해야 하는 주체는 피해자입니다. 과연 의학적 지식이 부족해 차트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일반인들이 복잡한 진료나 수술과정을 모두 파악할 수 있을까요? 비양심적인 의료인들은 사고가 나면 관련문서를 모두 숨기기에 급급합니다.

오죽하면 모 종합편성채널 시사예능프로그램에서 “의료과실을 일으킨 병원 앞에서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내는 등 한국식으로 시위하면 환자수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병원이 합의를 보려고 한다”고 말하겠습니까? 지난해 승용차 시동꺼짐현상에 대한 교환요구를 묵살하던 메르세데스벤츠에 반발해 고객이 골프채로 차량을 공개적으로 파손, SNS에서 화제를 일으킨 뒤에야 리콜을 실시했던 사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2012년 출범한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접수된 총 신청건수에서 조정이 성사된 경우는 절반이 되지 않습니다. 지난 17일 이른바 ‘신해철법’이 통과되면서 앞으로 사망, 중상 발생 시 의료기관과 의사 동의 없이 조정이 개시될 수 있습니다.

2012년 출범한 의료분쟁조정중재원에 접수된 총 신청건수에서 조정이 성사된 경우는 절반이 되지 않습니다.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은 의료기관, 의료인의 동의 없이는 분쟁조정을 실시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조정신청이 3796건 접수됐지만 실제 조정된 것은 1607건. 42%로 절반에 못 미치는 수치죠. 그나마 지난 17일 ‘신해철법’으로 불리는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조정신청접수 시 바로 조정이 이뤄지도록 제도가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의료사고피해자가 아니라 사망, 중상자만 이 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의사협회 역시 “이 개정안으로 인해 의사가 방어진료를 할 수밖에 없어 진료상황이 피폐해질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양 측에서 법에 대한 볼멘소리가 나오는 만큼 의료분쟁조정의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이네요.

우리는 언제쯤 의료과실의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까요?

여전히 의사는 갑, 환자는 을의 위치에 있습니다. 의료인들은 본인이 제어할 수 없는 의료과실에 대한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끼고 있지만 여전히 사회적 약자는 의료과실로 인한 피해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라젠카, 세이브 어스’의 의미인 “우리를 구해주시오, 라젠카!”처럼 피해환자들을 든든하게 지켜줄 ‘가이런’은 언제쯤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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