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약한 법규정 탓 있으나마나한 ‘4분의 기적’
미약한 법규정 탓 있으나마나한 ‘4분의 기적’
  • 이보람 기자
  • 승인 2013.03.20 17: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ㆍ‘빛 좋은 개살구’ 자동제세동기

안일한 법 제정과 비용부담 문제로 인해 공동주택 등에 배치된 자동제세동기가 무용지물로 전락, 방치되고 있음이 본지 취재결과 밝혀졌다. 지난해 8월부터 500세대 이상 아파트에 자동제세동기 설치가 의무화됐다.

자동제세동기(AED)는 심장마비환자 발생 시 전기충격을 통해 심폐소생술과 병행해 응급조치를 가할 수 있는 기기로 ‘4분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응급상황에서 꼭 필요하다.

응급상황에 꼭 필요한 자동제세동기가 찬밥신세가 된 것은 미약한 법 규정 때문. 현행법상 자동제세동기는 500세대 이상 아파트에 설치가 의무화돼 있지만 민간이 비용을 부담해야 하고 강제규정조차 없어 설치율이 극히 미미한 상태다. 뿐만 아니라 이에 대한 교육도 부족해 자동제세동기 사용법은 물론 기기 자체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주민이 대다수다.

 
 
서울 홍은동 A아파트 주민들이 자동제세동기(AED) 사용 교육을 받고 있다. | LG유플러스 제공

△처벌규정 없고 민간기업이 설치

상황이 이런데도 보건복지부 등 관계당국의 조치는 충격적이다. 법률시행 반년이 경과했지만 보건당국은 아파트 내 자동제세동기 설치율조차 집계하지 않고 있다.

안일한 법 제정과 관리소홀, 홍보부족 등 삼박자가 맞아떨어져 주민들은 자동제세동기에 대한 이해는 말할 것도 없고 설치이유조차 모르고 있다.

자동제세동기가 설치된 경기도 안양 A아파트 주민 김 모(55)씨는 “몇 달 전에 해당 기계가 설치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기계가 어떤 기계이고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모른다”며“홍보는 물론 교육에 대한 통보조차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자동제세동기가 방치되고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공동주택 내 설치를 민간이 알아서 부담해야 하고 설사 비치하지 않아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 응급의료과 관계자는 “설치가 안 돼도 강제하거나 처벌할 규정이 없다”며 “국가지원 없이 민간이 부담하다 보니 설치하지 않았을 때 누굴 처벌해야 하는가라는 문제, 또 사용하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누굴 처벌해야하는가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민간기업에 의존하고 있는 자동제세동기 설치도 문제다.

현재 아파트 단지 내 설치된 자동제세동기의 대부분은 LG유플러스가 아파트단지에 미디어보드를 설치하면서 사회환원의 일환으로 공급한 것.

하지만 수익이 최고가치인 민간기업이 계속해 무상으로 자동제세동기를 설치할지 여부는 미지수다. LG유플러스는 전국 공동주택에 8000여개의 자동제세동기를 무료로 설치했다.

△심정지환자 가정서 58% 발생, 가장 많아

전문가들은 심정지환자 대다수가 가정에서 발생하고 있어 공동주택 등에 자동제세동기가 반드시 구비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심정지환자의 58%가 가정에서 발생하고 있어 26.6%인 공공장소보다 발생확률이 월등히 높았다.

자동제세동기를 갖추지 않아 발생하는 피해도 크다. 현재 우리나라의 심정지환자 생존율은 3.3%로 미국(시애틀)8.8%, 일본(오사카)12%, 스웨덴 14% 등에 비해 크게 낮다. 심정지환자가 발생했을 때 일반인 심폐소생술과 구급대원의 자동제세동기 실시율도 각각 1.4%와 9.4%에 불과했다.

△홍보 미흡…살릴 수 있는 사람도 천국행

자동제세동기 사용법 등에 대한 홍보 미흡도 심각한 수준이다.

소방방재청 119구급과 관계자는 “심정지환자가 발생했을 때 일반인이나 기초적인 의료지식을 갖고 있는 이들이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심폐소생술과 자동제세동기인데 보급에 비해 홍보나 교육이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며 “어릴 때부터 교통안전교육처럼 자동제세동기 사용법과 심폐소생술을 익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어려서부터 자동제세동기 사용법과 심폐소생술 교육을 실시해야만 성인이 된 후 응급상황에서 신속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기초교육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자동제세동기 사용과 심폐소생술 가치에 대한 정부당국의 지속적인 홍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재 심폐소생술은 민방위훈련 때 시간 때우기 수업으로 전락했고 유치원은 물론 초·중·고등학교에서도 이와 관련된 교육은 미미하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문정림 의원(새누리당)이 지난해 연말 학교보건법 일부개정법률안을 통해 ‘초·중등교육법’ 제2조에 ‘학교에서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보건교육에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에 관한 교육을 포함해야한다’고 발의했지만 인명을 살릴 수 있는 소중한 기기인 자동제세동기는 공동주택에서 방치되고 있고 이에 대한 홍보나 교육도 부실해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살릴 수 있는 사람을 천국으로 보내는 일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보람 기자 boram@k-health.com

◆이중의 교수<분당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심폐소생술 교육은 내 가족 살리는 일”



“심정지환자에게 1분 안에 심폐소생술을 시작하고 3분 안에 제세동기를 사용하면 심정지환자 소생률은 70%에 달하고 본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는 건 90~100%까지 가능합니다.”

분당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이중의 교수는 자칭 타칭 심폐소생술과 자동제세동기 사용법 전도사다.

일반인이 교육만 받으면 소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심폐소생술과 자동제세동기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자동제세동기가 국내 공공기관에 많이 설치된 데다 아파트 설치도 의무화되면서 ‘활용도를 걱정해야할 시기’가 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엄청나게 좋은 자원이 우리 사회에 깔려 있지만 제대로 활용 못하는 것이 현실이자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교육’을 받아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일반 시민이 접근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이다. 사실 심폐소생술이나 자동제세동기 사용법을 익히기 위해선 1년에 3~4번 3시간 이상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에 이 교수는 먼저 정확한 ‘홍보’를 통해 심폐소생술과 자동제세동기 사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정말 이 부분을 많이 고민하다보니 별별 생각을 다 해봤다”며 “가장 인기를 끄는 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 중간에 심정지상황을 연출해 소생법이나 자동제세동기 사용법을 알리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다”고 말했다.

그는 “경각을 다투는 심정지환자 소생률을 높이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교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보람 기자


◆현장취재
500세대 이상 아파트 10곳 중 7곳 설치완료…교육은 절반도 안돼

본지 취재팀이 수도권 내 500세대 이상 아파트 10곳을 대상으로 자동제세동기 설치 실태를 조사한 결과 10곳 중 7곳은 설치를 완료했지만 이 중 주민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 곳은 3곳에 불과했다. 또 교육 대상자도 극소수라 실제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땐 119가 올 때까지 발만 동동 굴러야 하는 상황인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시 역삼동 A아파트는 738세대로 설치 의무 공동주택이지만 아직 설치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반포 B아파트는 2991세대로 자동제세동기가 44개동에 하나씩 설치됐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은 했지만 정확한 참여인원은 파악할 수 없었고 아직까지 자동제세동기를 사용해본 적도 없었다.

708세대가 입주한 청담 C아파트의 경우 지난해 5개동에 각각 1개씩 설치됐지만 아직 교육은 진행되지 않았다.

고덕동 D아파트 역시 지난해 10월에 설치됐지만 교육은 진행되지 않고 사용실적도 없는 상태였다. 인근 E아파트는 1124세대지만 자동제세동기는 휘트니스센터가 있는 건물에만 설치돼 있었고 휘트니스센터 직원들만 교육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강동 F아파트는 3226세대가 살고 있는 대규모단지인데도 아직 설치되지 않았으며 설치계획도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기도 분당 G아파트는 지난해 여름 한 대를 설치한 후 공지는 했지만 교육은 없었다. 인근 H아파트 역시 17개 동에 자동제세동기를 설치했지만 교육은 진행하지 않았다. 취재결과 경기도 분당 G아파트만 주민들을 대상으로 지금까지 세 차례 교육을 실시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