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잡스가 ‘독서광’인 이유
빌 게이츠·잡스가 ‘독서광’인 이유
  •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13.04.12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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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라나 유적에서 기생충 알을 찾는 일을 한다. 사람이 죽고 나면 기생충은 부패해서 없어지지만 그 알들은 보존돼 그 시대를 증명한다. 이것이 고기생충학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물론 알만 발견한다고 해서 일이 다 되는 건 아니다. 과거 사람들로부터 기생충의 알이 나오는 건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사건이니까. 
 
중요한 것은 유적에서 발견된 알에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아는 것으로 필자는 이것을 기생충 알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것이라 믿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현생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서 처음 탄생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 과정에서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한 다른 종들과 다툼이 있었겠지만 인류는 결국 지구의 패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한다.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아시아로 대표되는 구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어떻게 넘어갔느냐 는 것이다.
 
유럽인의 기준에선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처음 발견했지만 그 땅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 가장 유력한 학설은 1만3천 년 전 지구를 강타했던 빙하기 때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에 놓인 베링해가 얼렸고 꽁꽁 얼은 그 길을 따라 인류가 아메리카로 건너갔다는 설이다.
 
실제로 멕시코 근처 클로비스라는 곳에서 돌로 된 연장을 썼던 인류의 흔적이 발견됐는데 연대를 추정해 보면 빙하기 때와 얼추 비슷한지라 이 ‘클로비스 문화’는 인류가 베링해를 건너서 이동했다는 유력한 증거로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구충알의 발견이 이 학설을 뒤집었다. 7천 년 전으로 추정되는 브라질 유적이나 4천 년 전 칠레 유적에서 구충 알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상륙하기 훨씬 전이니 구충은 고대 인류가 갖고 들어간 거다. 그런데 구충은 땅속에 있는 유충이 사람 피부를 뚫고 감염되는 기생충으로 땅의 온도가 최소한 17도 이상이 돼야 전파가 가능하다. 즉 고대 인류가 꽁꽁 얼은 베링해를 건넜다면 구충이 새로 전파되는 건 불가능한 것이기에 인류가 몸속에 구충을 지니고 건너는 게 신대륙에 구충을 전파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구충의 수명을 4년으로 잡으면 그 안에 베링해를 건너기 위해서는 하루 2킬로 이상의 속도로 전진해야 한다. 물론 이건 최단거리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사방이 얼음인 곳에서 별다른 목표도 없는 그들이 그렇게 빨리 전진했을지는 의문이다.
 
이에 고대 인류가 베링해를 건너서 가기도 했겠지만 몸에 구충을 지닌 채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에 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밖에 없다. 태평양을 건널 수 있는 항해술은 기원전 6천 년 전에도 가능했기에 그들이 바다를 건넜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7년이 넘게 고기생충학을 하면서 수많은 기생충 알을 찾긴 했지만 구충알에 담긴 스토리처럼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낸 적은 아직 없다. 하지만 몇 가지 소득은 있었다.
 
조선시대 양반집 자제들은 다섯 살 정도에 이미 회를 먹기 시작했다든지 삼국시대부터 생선회를 먹었다든지 하는 것도 고기생충학이 밝혀낸 사실들이다. 작년 말에는 한 임산부 미라에서 발견한 폐디스토마의 알을 근거로 ‘조선시대에는 가재즙이 보양식이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흔히 과학은 단순히 실험만 하는 분야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고기생충학이 유적에서 찾은 알에 스토리를 부여하는 것처럼 과학은 인문학적 상상력을 아주 많이 필요로 하는 학문이다.
 
상상력을 기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폭넓은 독서인데 잡스나 빌 게이츠는 물론이고 최재천 선생님 같은 훌륭한 과학자들이 엄청난 독서가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구충 앞부분.

 
하지만 한창 책을 읽어야 할 청소년들이 스마트폰에만 빠져 있는 현실은 우리나라 과학이 앞날이 걱정되는 대목이다. 훌륭한 과학자는 스마트폰이 만연한 사회에서 배출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노벨 과학상이 나오길 바란다면 청소년들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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