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의학과 교수의 기생충 사랑
영상의학과 교수의 기생충 사랑
  •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13.05.2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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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미나리를 먹지 말자는 한 교수의 경고가 기사로 떴다. 미나리에 간질이라는 기생충의 유충이 들어 있어 미나리를 먹다가 감염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 교수의 지적이었다.
 
소의 간, 좀 더 구체적으로는 담도를 주로 침범해 ‘간질’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기생충은 사람에게 들어오면 담도를 팽창시켜 극심한 통증을 유발할 수 있고 눈을 침범해 심한 염증을 일으킬 수도 있다. 실제로 1994년 우리나라 20대 남성 한명이 간질로 인해 눈 한쪽을 빼내는 참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교과서에 따르면 간질의 감염원은 물가에서 자라는 풀, 즉 수초(watercress)다. 간질이 그리 흔한 질환은 아니지만 한번 걸리면 치명적일 수 있고 약에도 저항성이 있으니 수초에 대한 경계령을 내려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려면 수초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실제로 외국에서는 수초에 대한 연구가 제법 이뤄졌고 수초에서 간질의 유충도 발견된 적이 있다. 기생충 선진국인 프랑스만 해도 15년간 수초가 자라는 59곳을 조사해 ‘수초의 1~2% 정도에서 간질유충이 발견됐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우리 학계에서는 미나리를 의심한다. 평소 어머니가 만들어준 미나리즙을 마셨다는 어린이가 간질에 걸렸다는 보고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 번도 간질의 감염원에 대한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는지라 “미나리 조심하세요”라는 말을 함부로 할 수도 없다. 미나리상인들이 항의해오면 변명이 궁색해서다.
 
기생충학계가 침묵하는 동안 미나리즙시장은 날로 성장하는 듯하다. 포털사이트에서 검색해보면 미나리즙을 판매하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며 한 남자 분은 이런 글을 올렸다. “며느리가 매일같이 미나리즙을 갖다 바치는데 내가 복이 많구나.” 그 글을 보면서 ‘저러다 수술이라도 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는데 한 교수가 미나리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기사로 전달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그 교수가 기생충학자가 아닌 영상의학과 교수로 삼성병원에서 일하다 퇴임하신 임재훈 교수라는 사실이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싶겠지만 기생충에 대한 그분의 관심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임 교수는 기생충 감염 시 나타나는 호산구증다증이 우리나라 사람들에서 유독 많이 나타난다는 데 주목했고 그것이 소간을 통해 감염된 개회충 때문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혔다. 개회충에 걸린 환자들을 보고하면서 소간의 위험성을 알린 분도 임 교수였고 ‘개회충증, 포기한 질환’이란 논문에서는 임상의사들이 개회충에 대해 잘 몰라 제대로 진단이 이뤄지고 있지 않다면서 의사들을 질타하기도 했다. 필자를 포함한 기생충학자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주고 계신 임 교수를 보면서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했다.
 
기생충학자보다 더 기생충을 사랑하셨던 임 교수는 올 2월 삼성병원에서 정년퇴임하셨는데 퇴임을 며칠 앞두고 갑자기 전화를 주셨다. 말로만 듣던 분과 통화한다는 사실에 무척 긴장했는데 그는 한 시간여 동안 “미나리를 조사하지 못하고 가는 게 안타깝다” “소간에 얼마나 많은 개회충이 있는지 서 교수가 꼭 밝혀주기 바란다” 등의 당부말씀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열정이 넘치는 교수가 계신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고 아무리 어려워도 미나리와 소간만큼은 해결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명색이 기생충학자인데 영상의학과 교수보다 기생충에 대한 열정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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