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하 원장의 웰빙의 역설] 비위가 안 좋으면 췌장과 위장이 약하다고요?
[한동하 원장의 웰빙의 역설] 비위가 안 좋으면 췌장과 위장이 약하다고요?
  • 한동하 한의학박사(한동하한의원 원장)
  • 승인 2018.01.0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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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특정 향이나 맛이 역겨워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속이 느글거리는 증상이 있으면 ‘비위가 약하다’고 한다. 여기서 비위(脾胃)는 비장과 위장의 줄임말이다. 그런데 위장이야 그렇다 치고 비장은 소화와 크게 관련이 없는 장기인데 어떻게 비위가 소화기를 대변하는 장기가 됐을까. 지금의 췌장이 원래 비장이었다.

한동하 한의학박사(한동하한의원 원장)

보통 소화기관이라고 하면 음식물의 소화, 흡수, 배설과 관련된 장기를 말한다. 대표적으로 식도, 위장, 소장, 대장 등이 해당된다. 음식물이 직접 지나지는 않지만 췌장, 간장, 담낭 등도 소화에 중요하게 관여한다. 특히 췌장은 위장 뒤, 즉 후복막 쪽에 붙어 있는 장기로 소화효소와 함께 인슐린을 분비하는 중요한 소화기관 중 하나다.

모든 장기는 한의서에 기록돼 있고 과거 이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췌장이라는 단어는 현존하는 한의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지금 췌장이라고 불리는 장기는 과거에는 비장으로 불렀다. 동아시아에서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의학을 처음으로 도입한 일본은 당시 비장으로 불렸던 ‘pancreas’를 ‘膵臟(췌장)’으로 번역해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비장’이라는 이름은 왼쪽 옆구리에 붙어 있는 ‘spleen’에게 주었다. spleen은 왼쪽 옆구리 쪽에 붙어 있는 면역기관 중 하나지만 당시에는 명확한 이름이 없었다.

췌장(膵臟)의 ‘췌(膵)’자는 일본에서 만들어진 한자어다. 어원을 살펴보면 원래 중국 한자인 ‘취(脺)’자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는 ‘무르고 약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실제로 췌장을 만져 보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느낌이 있다. 췌장의 영어이름인 pancreas가 그리스어에서 유래됐고 ‘pan(모두)’과 ‘kreas(신선한 고기)’의 합성어인 것도 일맥상통해 보인다.

췌장은 이자(胰子)라고도 한다. 췌장과 달리 이자라는 단어는 오래전 한의서에도 등장한다. 외대비요(당나라), 본초강목(청나라) 등의 한의서에는 돈이(豚胰), 양이(羊胰), 견이(犬胰) 등의 명칭이 나온다. 주로 동물에 이자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다. 반면 동의보감에는 이자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동의보감에는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의 경우에도 이자 대신 비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당시에 이자는 비장이었고 비장은 이자였다.

일부 학자들은 과거 비장이란 단어는 지금의 췌장과 비장을 모두 지칭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기록상 비장의 형태가 ‘마제(馬蹄, 말발굽)’ 같다는 등의 표현은 지금의 비장을 가리킨 것이고 ‘도겸(刀鐮, 낫)’처럼 생겼다는 것은 지금의 췌장을 지칭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한의서에 기록된 비장의 생리작용 중 ‘운화작용(運化作用, 소화흡수 및 영양공급)’은 췌장의 기능을 언급한 것이고 ‘비통혈(脾統血-혈액총괄)’ 작용은 지금의 비장기능을 말한 것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한의서를 보면 비장은 췌장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례로 동의보감에 기록된 비장의 형태와 기능을 쉽게 풀어보면 ‘비장은 모양이 말발굽이나 낫 같기도 한데, 위장을 도와서 음식이 잘 소화되게 한다. 위장이 음식을 주로 받아들인다면 비장은 주로 소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위치는 명치와 배꼽 사이에 있으면서 몸통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바로 지금의 췌장을 설명한 것이다.

과거에도 왼쪽 옆구리에 붙어 있는 지금의 비장 ‘덩어리 조직’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말로 지라라는 이름도 있으면서 왜 제대로 된 한자 이름이 없었는지 안타깝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췌장은 여전히 비장으로 불려야 하고 지금의 비장에게 새로운 명칭이 지어져야 했다.

언어에는 사회성이 있다. ‘비위(脾胃)’의 ‘비(脾)’가 비장이든지 췌장이든지 상관이 없다. 어찌 됐든 요즘은 ‘비위가 약하다’고 하면 누구나 소화기가 약하다는 의미로 알아듣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래전 췌장으로 창씨개명 당한 비장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다. 그래서 기억하고자 한다. 비위의 비는 ‘비장’인데도 어쩔 수 없이 ‘췌장’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정리 장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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