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보텀의 추억
윈터보텀의 추억
  •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13.07.0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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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데이’의 영화평을 보는 순간 내 스타일의 영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주 평론은 이렇다. 마약밀수로 수감된 남편 때문에 4명의 아이들을 혼자 돌봐야 하는 아내가 주인공인데 눈물을 짜내지도 그렇다고 무작정 희망을 암시하지도 않는데도 무지하게 감동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가 꼭 내용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감독의 이름도 큰 몫을 했다. ‘마이클 윈터보텀’ 성만 따지면 겨울의 밑바닥이란 뜻인데 이런 성을 가진 사람을 난 또 한 명 알고 있다.


아주 어릴 적 ‘뿌리’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알렉스 헤일리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자신의 조상이 어떻게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건너왔으며 어떻게 정착했는지를 추적한 다큐멘터리였다.

목 뒤 림프절을 만져보고 수면병 감염 여부를 판단했던 원터보텀 사인.

미국에 건너온 헤일리의 1대 조상은 ‘쿤타 킨테’ 그는 아프리카 대초원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던 젊은이였다. 그는 사냥을 하던 도중 노예상인들에게 붙잡혀 미국행 배에 실린다. 배에는 비슷한 처지의 흑인들이 잔뜩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광경이 연출됐다.


노예상인이 노예로 잡힌 흑인들을 갑판에 일렬로 세운 뒤 목 뒤를 만지고 그 중 일부를 그냥 바다에 던져버리는 게 아닌가? 도대체 왜? 어린 나로서는 그 장면이 노예상인들의 잔인성을 말하려는 거라고 정리 해버렸다.


열 살 때 가졌던 그 의문이 풀리기까지는 십년이 걸렸다. 본과 2학년 때 기생충학을 강의하셨던 교수님은 그게 ‘수면병’ 때문이라고 말해주셨다. 아프리카, 특히 사하라 남쪽 지역에 유행하는 수면병은 사람의 뇌에 심한 염증을 일으켜 의식을 혼탁하게 만드는데 그렇기 때문에 꼭 자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병이다.


그 수면병의 병원체가 사람 몸에 들어오면 일단 림프절로 가서 염증을 일으키는데 주로 침범하는 림프절이 목 뒤의 림프절이란다. 이 증상이 모든 환자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목뒤 림프절이 붓는다고 해서 무조건 수면병인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목 뒤 림프절을 만져보는 것이 수면병 초기에는 진단을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고 한다.


수면병에 나타나는 이 특징적인 증상을 ‘윈터보텀의 징후’라고 불렀다. 그 드라마의 영향 때문인지 처음에는 윈터보텀이 건강한 노예를 구별하는 데 도가 튼 노예상인이라고 생각했다. 노예를 팔아 돈을 많이 번 뒤 이름을 후세에 날리기 위해 윈터보텀 사인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지만 토마스 윈터보텀(Thomas M. Winterbottom)은 18~19세기 수면병의 유행지인 시에라리온에 4년간 살았던 의사였고 당시 노예상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유럽으로 노예를 데려갈 때 목 뒤 림프절을 만져보고 수면병 감염 여부를 판단한다는 것을 알아내 이를 최초로 기술한 사람이란다. 게다가 목뒤 림프절이 붓는 증상에 그의 이름을 붙인 건 후세 사람들이었다.


윈터보텀 사인은 수면병의 병원체가 면역계의 정류장이라 할 림프절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신호다. 이런 전투가 이루어지려면 환자의 혈액 속에 병원체와 싸울 군사들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한다.


늘 수면병의 위협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사람들은 맞서 싸울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아프리카에 처음 오는 여행객들은 이런 대비가 없다. 윈터보텀 징후는 여행객들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 건 그 때문이고 수면병의 잠복기가 짧아 증상이 훨씬 빨리 나타나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러니 윈터보텀 징후가 없다고 수면병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프리카에서 수면병의 매개체인 체체파리에게 물렸다면 빠른 시간 안에 검사를 받는 게 좋겠다.


세계보건기구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아프리카의 수면병은 점점 줄고 있지만 여행객의 수면병은 증가 추세에 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여행객들을 위한 정보 한 가지를 전하고자 한다. 체체파리는 줄무늬에 약하니, 줄무늬 옷을 입으면 체체파리에 덜 물릴 수 있다. 아프리카 여행객들이여, 줄무늬 옷을 챙기시라.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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