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박사의 참회…“난 전문가가 아닌 교수에 불과했다”
기생충 박사의 참회…“난 전문가가 아닌 교수에 불과했다”
  •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13.07.26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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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나충과 연가시를 다룬 첫 편을 시작으로 EBS 다큐 프라임 ‘기생충’ 4부작이 7월 22일부터 25일까지 4일간 방영됐다.

 

‘기생충을 제대로 담아낸 한국 최초의 다큐멘터리’란 수식어는 이 다큐의 진가를 드러내기엔 역부족이다. 영국 BBC에서 3부작으로 만들어 화제가 됐던 다큐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이기 때문이다. 1년이 넘는 시간을 투자해 걸작을 만들어 낸 제작진에게 경의를 표한다.

 

이 다큐에는 여러 외국 교수들이 나온다. 밀림개미의 대가를 비롯해 연가시만 연구한 학자, 바닷가에서 게만 들여다보는 학자…. 그 대가들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예컨대 개미연구를 하는 학자는 나무에 매달린 줄을 타고 나무 위로 올라가 개미를 관찰했고 바닷게를 연구하는 학자는 모래밭에서 게를 들여다보며 기생충에 걸린 게와 그렇지 않은 게의 차이를 설명했다. 그들의 표정에서 난 그들이 정말로 그 일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자막에 나오진 않았지만 그들은 필드에서 채집하고 연구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을 터였다. 그들의 목소리에서 연구대상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고 그들의 말이 권위를 갖는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사람의 기생충만 해도 할 것이 많은데 개미의 기생충에 왜 그런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는지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세상이 알아주든 말든 그들은 별 관심이 없다. 이 개미의 배가 왜 빨갛게 되는지가 그들에겐 더 중요하니까. 세상에선 이런 이들을 전문가라 부른다.

 

이 다큐를 준비하면서 EBS가 필자를 찾아왔을 때 제작팀이 내게 바란 것도 바로 전문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내가 연구하는 주제만큼은 어느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더 잘 다루는 그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난 그들이 생각한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필드나 실험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연구실 컴퓨터 앞에 앉아 별반 좋지도 않은 데이터를 짜깁기해 논문을 짜내고 ‘기생충의 대중화’란 미명하에 전문가들이 쓴 논문들을 이용해 외부강연을 하거나 글로 쓰는 게 내 일상이었으니 말이다.


내게 맡긴 일들이 지지부진하거나 성과가 없자 EBS 팀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 기생충 전문가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사람이란 적응의 귀신들이다. 그들 역시 내게 적응했고 나중엔 거의 기대를 안 하게 됐다.

 

거기엔 쥐를 이용한 성선택 실험이 참담한 실패로 끝난 게 컸다. 24시간 카메라를 동원해 촬영을 하고 며칠 밤을 새워 데이터를 분석했지만 결과를 방송에 쓸 수 없게 된 충격은 상당했을 것이다. 그 실패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그런 종류의 일을 오랫동안 해온 전문가가 아니라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변명을 할 수는 있다. 평생에 걸쳐 자신만의 관심사를 연구하는 게 가능한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당장 논문거리가 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교수직을 유지하지 못하니까. 연구비를 탄 지 1-2년 안에 결과물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되는 풍토도 수 십 년에 걸친 연구를 가로막는 원인이다.

 

그렇다고 내가 실험보다 연구실에 앉아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걸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다. 평소 ‘기생충학의 대가’인 척 강의를 하고 돌아다녔지만 필드에서 일하는 진짜 대가들을 보니 부끄러움이 확확 묻어났다.

 

그러니까 교수이긴 하지만 전문가는 아닌 셈이고 논문 숫자는 내가 많을지 몰라도 논문의 학문적 가치는 그 대가들과 비교할 수가 없는 거다. 갑자기 미국 야구선수 탐 글래빈(Tom Glavine)이 떠오른다. 느린 공으로 300승을 달성한 전설적인 투수인 글래빈은 은퇴를 하던 날 이런 명언을 남겼다.

 

“야구에 대한 내 열정은 스피드건에 찍히지 않는다.” 비슷한 말을 EBS 다큐에 나온 대가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겠다. “기생충에 대한 전문가들의 열정은 논문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다.”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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