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인에게서 처음 증상이 나타난 것은 20년 전이었다. 오른쪽 허벅지에 종괴가 나타났다가 몇 달 후 무릎 뒤쪽으로 갔고 거기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사라졌다는 것.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뒤 그 종괴는 발목 근처에 나타났고 환자에게 걸을 때마다 통증을 유발한 것이었다. 즉 환자의 입으로 들어간 스파르가눔은 곧 십이지장을 뚫고 나왔고 복강을 헤매던 끝에 허벅지에 갔다가 무릎 뒤쪽 공간으로 내려와 19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가만히 있던 스파르가눔은 어느날 심경변화를 일으켜 발목으로 내려와 의사에게 걸려 20년의 삶을 마감했다. 그 세월을 증명하듯 스파르가눔의 길이는 18센티미터나 됐다.
더 놀라운 일은 1년 후에 벌어졌다. 환자는 전과 비슷한 위치에 종괴가 나타난 것을 발견했고 혹시나 해서 병원에 왔다. 발목 위를 절개해 보니 역시 하얀 물체가 고개를 쳐들고 노려보고 있었다.
20년 전 여인이 저수지의 물을 마실 때 들어갔던 스파르가눔이 두 마리였던 모양이다. 그 한 마리가 어디서 어떤 세월을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허벅지까지 온 뒤 먼젓번 스파르가눔이 만들어 놓은 길을 발견했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앞서 발견된 스파르가눔이 뚫은 통로는 우리 몸의 재생기전에 의해 다시 막혔겠지만 그래도 처음 뚫을 때보다는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두 번째 스파르가눔은 앞서 만든 길을 따라 첫 번째 벌레가 생을 마감했던 근처까지 왔고 거기서 의료진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파르가눔이 한번 만들어진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인데 이 대목에서 김구 선생이 즐겨 읊으신 시구가 떠오른다.
“눈을 밟으며 들길을 갈 때/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마라/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오는 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니.”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중앙정보부는 그 막강한 정보력과 권위를 이용해 국내정치를 쥐락펴락했다. 폐해가 심각해지자 이름을 국가안전기획부로 바꿨고 김대중정부가 들어선 뒤 다시 이름을 국가정보원으로 바꾸고 해외정보수집과 대공사업에만 전념하게 했다. 하지만 그 습성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는 노릇인가보다.
지난 세월 국정원과 그 전신이 자행했던 국내정치 개입의 전통은 정권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는 이유가 됐다. 지난 대선 덜미가 잡힌 국정원요원의 댓글공작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번 사건이 어이없는 것은 그래도 전문가인 국정원요원이 직접 인터넷에 댓글 다는 일을 했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국정원의 자존심은 어디다 팽개쳤는지 의문스럽다. 일부의 말처럼 그 공작이 대선의 승패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해도 문제는 남는다. 명색이 국정원요원이란 사람이 티도 안 나는 쓸 데 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은 셈이니 말이다. 두 번째 스파르가눔이 앞선 스파르가눔의 발자취를 따라갔듯이 국정원 역시 선배들이 했던 길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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