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아, 다음 생엔 꼭 인간으로 태어나라
기생충아, 다음 생엔 꼭 인간으로 태어나라
  •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13.09.27 09: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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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가 자신이 키우던 소에게 받혔다. 평소 묵묵히 풀만 씹고 있어 온순하게만 느꼈던 소에게 그런 면이 있나 싶은데 병원에서 검사해보니 갈비뼈가 부러졌단다. 마취하고 수술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망할노무 소, 잡아 묵어뿐다”고 씩씩댔다.

반전은 그 다음에 있었다. 수술 후 다시 가슴촬영을 한 결과 뭔가 이상한 게 발견됐고 혹시나 싶어 검사해보니 폐암이었다. 폐암은 조기에 발견되면 80% 이상 완치가 가능하지만 3기쯤 되면 5년 생존확률이 30% 이하로 떨어진다. 하지만 폐암은 불행히도 조기진단이 어려워 발견된 경우 3기 이후가 많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폐암은 1기에 불과했고 덕분에 완치될 수 있었다. 몇 달 뒤 할아버지가 고맙다면서 자신이 재배한 고추를 한 부대 가져왔다. 의사가 물었다. “그 소, 잡아 드셨냐고.” 할아버지가 웃으면서 대답하신다. “아유, 아들 삼았습니더.”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를 굳이 언급한 이유는 이와 비슷한 미담이 기생충계에도 전해 내려오기 때문이다. 1994년 경남 함양군에 살던 55세 남자가 아산병원을 찾았다. 원래는 건강했지만 일주일 전부터 윗배가 너무 아팠고 피를 토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서였다. 개인병원에서 지은 약을 먹고 통증이 좀 완화되기는 했지만 혹시 큰 병일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권유에 따라 큰 병원을 찾아 서울로 올라온 것이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것이 호르텐스극구흡충이 궤양을 파먹는 장면(왼쪽). 기생충을 제거하고 나자 십이지장 궤양이 보인다. 하얀 것은 조영제(오른쪽).검사결과 빈혈이 약간 있었을 뿐 별 이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윗배가 아팠으니 이때 할 수 있는 검사로는 위내시경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지금과 달리 그때는 내시경이 매우 굵은 데다 잘 구부러지지도 않았고 수면내시경도 아니었지만 고통을 참고 검사한 보람은 충분했다. 환자의 위에서 조기 위암이 발견됐으니 말이다.

놀라운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내시경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려 보니 십이지장에 궤양이 있었는데 그 궤양을 기생충 한 마리가 파먹고 있었다. 위암이 통증을 일으키는 일은 거의 없어 환자가 윗배에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던 것은 기생충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기생충이 없었다면 환자는 병원에 가지 않았을 테고 환자가 암을 발견하는 것은 몇 달, 어쩌면 1년쯤 뒤였을지도 모른다.

이 고마운 기생충의 이름은 호르텐스극구흡충. 얼룩동사리를 비롯한 민물고기를 회로 먹으면 걸리는데 역시나 환자는 지리산 근처에서 민물고기회를 매우 즐겨 먹었단다. 위에서 말한 할아버지가 소를 아들로 삼은 반면 이 환자는 자기를 살려준 기생충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디스토시드를 먹어 작은창자에 잘 있던 호르텐스극구흡충 세 마리까지 죽여버렸다.

의도는 나빴을지언정 결국 좋은 일을 한 기생충으로서는 황당할 노릇. 그 기생충에게 위로의 말을 한번 건네 본다. 책에 나오는 에피소드는 훈훈한 결말로 끝나지만 할아버지를 구한 소도 그리 잘 대접받지는 못했으리라. 아들로 입양됐어도 유산을 상속받지 못한 것은 당연하고 자신을 아들로 삼았는지 알 턱이 없는 소가 들이받는 데 재미가 들려 수시로 할아버지를 쫓아다니지 않았을까. 소가 무서워진 할아버지는 결국 그 소를 잡아먹거나 다른 데 팔았을 테고 말이다. 설사 할아버지가 의리를 지켰다 해도 그 후손들도 같은 마음을 가졌을 것 같지는 않다. 그게 이 땅에서 말 못하는 짐승이 짊어져야 할 슬픈 운명이다.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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