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박사 1호’ 임한종 선생이 위대한 이유
‘기생충박사 1호’ 임한종 선생이 위대한 이유
  •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13.10.11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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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투의 베란다쇼>에 합류하게 됐을 때 한 언론사는 필자의 프로필을 ‘국내 기생충박사 1호’라고 기재했다.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기생충학으로 박사를 받은 이는 300명이 넘고 98년에 박사를 받은 필자는 200위 안에도 못들 것 같다.

진짜 1호는 누구일까? 1963년 박사학위를 딴 전 고려의대 교수 임한종 선생님이다. 교수의 본분이 연구라 하면 국내 학자 중 선생님만큼 본분에 충실한 분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얼마 전 출간된 ‘기생충학 리포트: 중랑천에서 빅토리아 호 코메 섬까지’는 선생님의 연구인생을 고스란히 담은 회고록인데 이 책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평생을 두고 수필 한편도 써본 일이 없었다.' 어느 분야이든 간에 전문가 행세를 하는 데 책 만한 수단이 없고 내가 기생충 전문가로 불리는 것도 세 권의 기생충 대중서 덕분이지만 정말 훌륭한 연구자는 책을 쓰지 않는다. 연구만으로도 너무 바쁘니까.

선생님도 그러했다. 글을 쓰는 대신 ‘어딘가에 기생충이 있다고 하면 설사 그곳이 지옥이라고 할지라도 마다 않고 달려갔’단다. 기생충학에 입문한 지 60년이 되도록 기생충만 생각하고 사셨다니. 골다공증에 이은 골반골절로 휠체어에 의지하는 신세가 되지 않았다면 선생님은 지금도 현장을 누비고 계시리라.

다음 구절을 보자. ‘(탄자니아에서) 귀국 후에 뜻하지 않게 암 진단(전립선암)을 받았다. 이렇게 바쁜 중에 왜 이런 병에 걸렸는지 원망스러웠다. 병원에서는 하루속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라오스에서의 중요한 일을 마치고 수술을 받기로 했다.’

선생님은 떡잎부터 알아본 인재였다. 이미 고2 때 개구리 기생충을 연구해 전국과학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이래 기생충학을 평생의 꿈으로 삼았으니까. 선생님은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나는 장래 기생충학을 연구해야 할 소명을 받은 사람이므로 이 전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이런 분이셨으니 기생충학에서 엄청난 업적을 세운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불치병이었던 간디스토마 치료약을 개발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고 사상충을 비롯한 다른 기생충질환 박멸에도 선생님의 공헌이 적지 않다. 정년퇴임을 한 후에는 오지를 다니면서 기생충 박멸에 힘쓰셨는데 무엇보다 책 뒤에 수록된 305편의 논문 제목들이 선생님의 연구인생을 증명해 준다. 우리나라 기생충학이 다른 분야에 비해 앞서나갈 수 있었던 건 이렇게 훌륭한 분이 ‘기생충학 1호 박사’였기 때문이리라.
“자네는 임상을 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느냐?” 임한종 선생님의 대학 은사가 하신 말씀이다. 기초의학에 국가적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의사 수가 부족해 임상을 하면 떼돈 버는 게 가능했던 시기였으니 기초 중에서도 마이너에 속하는 기생충학을 전공하겠다는 선생님의 선택이 안타깝게 보였을 것이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흔들렸을 법도 하지만 기생충학에 대한 선생님의 의지는 상상 외로 굳건했던 모양이다. 비단 선생님뿐 아니라 연구에의 꿈을 안고 기초의학을 지원한 분들은 한둘이 아니었고 그분들이야말로 우리나라 의학을 단기간에 발전시킨 주역이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지금은 기초의학이 더 이상 배고픈 학문이 아니다. 임상의사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월급을 받고 논문을 쓸 때마다 인센티브를 받는다. ‘네이처’ 등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실으면 1억원 가량 보너스를 주는 곳도 있다. 하지만 요즘 의대생들은 더 이상 기초의학을 전공하려 들지 않는다. 기생충학은 물론이고 해부학, 생화학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라는데 예전과 달리 요즘은 개업을 해도 큰돈을 벌지 못하니 기초의학을 외면하는 현 세태가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의학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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