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의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기생충의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 서민 단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13.11.06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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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린네(Carl Linne)에 대해 그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다. 린네는 생물의 학명을 정할 때 속명(genus)과 종명(species)을 쓰고 발견자의 이름을 붙이는 소위 이명법을 창안한 학자인데 자신이 처음 그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거의 모든 생물에 자기 이름을 붙여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학명은 ‘호모사피엔스린네’로 왠지 모든 인간이 린네라는 학자에게 종속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후 발견자 이름까지 쓰면 너무 복잡하니 그냥 속명과 종명만 쓰자는 의견이 있었고 그 견해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덕분에 린네라는 이름을 매번 봐야 하는 수고는 덜게 됐다.

기생충 이름 중에는 사람이름이 들어간 경우가 제법 많다.

기생충이 그리 환영받는 생물체가 아닌데도 굳이 자기 이름을 붙이려는 것은 후대까지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이리라. 실제로 인간의 장에 살면서 설사와 복통을 일으키는 기생충에 자기 이름을 붙인 요코가와 선생의 경우 본인은 물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생충학을 전공한 아들까지 ‘요코가와흡충의 전문가’로 군림하게 만들었다. 요코가와 선생이야 워낙 위대한 학자라 별 이견이 없었지만 이름 붙이는 것이 늘 순조로운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부케레리아 반크롭티(Wuchereia bancrofti)라는 기생충을 보자. 이것은 다리를 굵게 만드는 나쁜 기생충인데 여기에 이런 맥락 없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두 학자 간에 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1866년 부케러(Otto Wucherer)라는 학자가 환자의 혈액에서 긴 벌레를 발견한다. 부케러는 그 기생충이 실처럼 생겼다고 해서 미세사상충(작은 실벌레)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벌레는 유충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반크롭트(Joseph Bancroft)라는 학자가 환자의 림프절에서 성충을 발견하고 반크롭트사상충이라고 명명한다. 기생충은 하나인데 발견자는 두 명인 셈. 둘은 서로 싸우다가 ‘부케레리아 반크롭티’에서 타협을 본다. 두 학자의 알력 때문에 기생충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어려운 이름을 외워야했다.

비슷한 예가 또 있다. 말레이사상충(Brugia malayi)의 경우 브룩(Rotterdam Brug)이 유충을 발견했고 그 후 라오와 마플스톤이 성충을 공동으로 발견한 것. 하마터면 세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기생충이 탄생할 뻔했지만 다행히 잘 타협해 말레이사상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생충에 붙은 이름이 모두 학자의 명예욕을 상징하는 건 아니다. 후세사람들이 학자의 업적을 기려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샤가스씨병을 연구한 샤가스(Carlos Chagas)는 이 병의 원인이 되는 기생충을 발견한 뒤 친구이자 자신을 후원해 준 크루즈(Oswaldo Cruz)에게 감사의 뜻으로 크루즈파동편모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93년 췌장염환자에게서 새로운 기생충을 발견한 서울의대 기생충학 교수팀은 기생충학교실을 국내 최초로 만든 기생충학의 아버지 서병설 교수를 기리는 뜻에서 이 기생충의 학명을 짐노팔로이데스 서아이(Gymnophalloides seoi)로 정했다. 이 기생충이 멸종하지 않는 한 서병설 교수의 존함은 두고두고 남으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다른 방법으로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김기춘 씨는 1992년 대선 때 지역감정을 유발해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자는, 소위 초원복국집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때의 반향이 어찌나 컸던지 사람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김기춘이라는 이름에서 그 사건을 떠올린다. 국정원장을 할 당시에는 그다지 업무를 잘 수행하는 것 같지 않던 원세훈 씨는 작년 대선 때 대북심리전의 일환으로 수행했다는 국정원 댓글사건으로 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김기춘 씨가 지금도 비서실장으로 잘 나가는 것이 이름을 널리 알린 덕분이니 원세훈 씨도 앞으로 잘 나갈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렇게 본다면 이름이란 일단 알리고 봐야하는 게 맞지만 정 그렇다면 차라리 필자에게 얘기했으면 좋을 뻔했다. 새로 발견되는 기생충에 이름을 붙여줄 수 있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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