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를 들어 인간의 학명은 ‘호모사피엔스린네’로 왠지 모든 인간이 린네라는 학자에게 종속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후 발견자 이름까지 쓰면 너무 복잡하니 그냥 속명과 종명만 쓰자는 의견이 있었고 그 견해가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덕분에 린네라는 이름을 매번 봐야 하는 수고는 덜게 됐다.
기생충 이름 중에는 사람이름이 들어간 경우가 제법 많다.
1866년 부케러(Otto Wucherer)라는 학자가 환자의 혈액에서 긴 벌레를 발견한다. 부케러는 그 기생충이 실처럼 생겼다고 해서 미세사상충(작은 실벌레)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벌레는 유충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반크롭트(Joseph Bancroft)라는 학자가 환자의 림프절에서 성충을 발견하고 반크롭트사상충이라고 명명한다. 기생충은 하나인데 발견자는 두 명인 셈. 둘은 서로 싸우다가 ‘부케레리아 반크롭티’에서 타협을 본다. 두 학자의 알력 때문에 기생충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어려운 이름을 외워야했다.
비슷한 예가 또 있다. 말레이사상충(Brugia malayi)의 경우 브룩(Rotterdam Brug)이 유충을 발견했고 그 후 라오와 마플스톤이 성충을 공동으로 발견한 것. 하마터면 세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기생충이 탄생할 뻔했지만 다행히 잘 타협해 말레이사상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생충에 붙은 이름이 모두 학자의 명예욕을 상징하는 건 아니다. 후세사람들이 학자의 업적을 기려 이름을 붙이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샤가스씨병을 연구한 샤가스(Carlos Chagas)는 이 병의 원인이 되는 기생충을 발견한 뒤 친구이자 자신을 후원해 준 크루즈(Oswaldo Cruz)에게 감사의 뜻으로 크루즈파동편모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93년 췌장염환자에게서 새로운 기생충을 발견한 서울의대 기생충학 교수팀은 기생충학교실을 국내 최초로 만든 기생충학의 아버지 서병설 교수를 기리는 뜻에서 이 기생충의 학명을 짐노팔로이데스 서아이(Gymnophalloides seoi)로 정했다. 이 기생충이 멸종하지 않는 한 서병설 교수의 존함은 두고두고 남으리라.
하지만 세상에는 다른 방법으로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김기춘 씨는 1992년 대선 때 지역감정을 유발해 김영삼 후보를 당선시키자는, 소위 초원복국집 사건을 일으켰는데 그때의 반향이 어찌나 컸던지 사람들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김기춘이라는 이름에서 그 사건을 떠올린다. 국정원장을 할 당시에는 그다지 업무를 잘 수행하는 것 같지 않던 원세훈 씨는 작년 대선 때 대북심리전의 일환으로 수행했다는 국정원 댓글사건으로 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됐다.
김기춘 씨가 지금도 비서실장으로 잘 나가는 것이 이름을 널리 알린 덕분이니 원세훈 씨도 앞으로 잘 나갈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렇게 본다면 이름이란 일단 알리고 봐야하는 게 맞지만 정 그렇다면 차라리 필자에게 얘기했으면 좋을 뻔했다. 새로 발견되는 기생충에 이름을 붙여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저작권자 © 헬스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