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의 마지막 보루 수의과대학
반려동물의 마지막 보루 수의과대학
  • 황철용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13.02.04 1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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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진료가 거의 마무리돼가는 늦은 오후 전국에서 위중한 질환을 앓고 있는 동물들이 마지막 희망을 품고 찾는 이곳 수의과대학 부속 동물병원 응급실 한쪽 병상에는 오늘도 가쁜 숨을 연신 몰아쉬는 반려견 한 마리가 누워있다.
 
너무나 아름다운 금색털에 제법 나이가 들어 얼굴 사이사이 흰털이 올라 온, 온화한 중년신사 같은 골든레트리버 수컷 ‘버니’는 지금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했던 가족들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힘겹게 몰아쉬는 호흡과 의식마저 혼미해 눈동자조차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버니’의 모습에 가족들은 오열했다. 이런 날이 올 줄 이미 예상했고 또 ‘흔들리지 않으리라’ 여러 번 다짐했지만 수년을 함께 한 가족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는 그런 다짐 자체가 소용없어 보였다. 그렇게 슬퍼하는 가족들을 뒤로 한 채 버니는 얼마 후 깊은 숨을 한 번 내쉬고는 편안히 눈을 감은 채 하늘나라로 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날은 버니를 가족으로 들이고 가장 많은 사랑을 줬던 큰 형의 생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생애 마지막 날이 가족 모두에게 축복된 날이었음을 안 것인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 모르지만 버니는 그렇게 끝까지 가족들의 마음 속 깊이 각인된 무언가를 남긴 채 떠났다.

매년 수의과대학에서는 동물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수혼비(獸魂碑) 앞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상에는 생전 반려동물이 좋아했을 법한 맛난 사료와 간식들이 함께 오른다. 


버니를 처음 만난 날은 낙엽마저 거의 떨어진 막바지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젊은 남자 옆에서 자신의 진료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황금빛깔의 골든레트리버는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끌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정말 멋진 애견이었다.
 
하지만 진료실에 들어와 버니의 피부 병변부를 진찰한 후 필자는 어떻게 이 상태를 설명해야 할지 순간 당황스러웠다. 귀 주위 피부와 하복부에 작은 멍자국 같이 발생된 피부병변은 버니의 몸속에 악성종양, 쉽게 말해 암이 자라고 있을 가능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의심되는 질환에 대한 설명을 상세히 한 후 암 진단을 위한 병리조직검사를 위해 버니를 마취시킨 후 피부조직 일부를 작게 절제하고 그날 진료를 마무리 했다.

며칠 후 병리조직 검사결과 버니는 예상한 바와 같이 악성피부임파육종으로 불리는 불치의 피부암을 앓고 있는 것으로 최종진단됐다. 이 피부암은 효과적인 치료법이 아직까지 알려진 바 없는 매우 치명적인 암이다. 
 

지금은 버니의 상태가 정상에 가깝지만 곧 급격히 악화될 것이며 피부종양 역시 보기 힘들 정도로 악화될 수 있다는 설명에 버니의 큰 형은 슬픔을 억누른 채 조용히 버니의 머리만을 쓰다듬고 있었다. 눈 주위가 붉어지고 입을 꽉 다문 채 자신의 머리만 연신 쓰다듬는 행동 자체가 큰 형답지 않게 생각되었는지 연신 앞발로 어서 집으로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필자는 조심스럽게 버니의 큰 형에게 하나의 제안을 했다. 사실 이 치명적인 암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치료법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지만 다수학자들이 이 암을 정복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 왔고 마침 필자도 새로운 치료법을 연구 중이었기에 그 치료법의 첫 임상에 버니가 참여하는 게 어떨지 제안한 것이다.
 
그렇게 버니는 큰 형의 동의 아래 새롭게 시도되는 항암요법의 첫 임상적용대상이 됐고 고맙게도 항암시작 후 얼마동안 몰라보게 암 병변이 줄어들면서 호전돼 잠시나마 우리 모두를 기쁘게 했다. 하지만 이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고 결국 암이 재발돼 가족들뿐 아니라 진료진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뒀다.
 
수의과대학 부속 동물병원에는 효과적인 치료방법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난치성질환에 걸린 동물들이 버니처럼 가족의 동의 아래 새로운 치료법 연구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런 연구에 참여하고 있는 동물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최선을 다해 이 절망스러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설령 그 시도가 실패로 끝났을지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반려동물들이 질병 해결에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역시 간절하다. 의학뿐 아니라 수의학의 발전, 좁게는 난치성질환의 정복 하나하나가 이러한 숭고한 정신을 기본으로 한다. 따라서 반려동물 뿐 아니라 우리가 건강한 이유 중 하나도 이들의 희생 덕분이라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매년 수의과대학에서는 동물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수혼비(獸魂碑) 앞에서 제사를 지낸다. 제사상에는 생전 버니가 좋아했을 법한 맛난 사료와 간식들도 함께 오른다. 올해 제사상에는 버니가 좋아했던 공 하나를 올려볼까 한다. 하늘나라에서도 친구들과 함께 버니가 실컷 공놀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황철용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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