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아 위한 외길 인술 50년…“죽도록 살리고 싶었다”
입양아 위한 외길 인술 50년…“죽도록 살리고 싶었다”
  • 김치중 기자
  • 승인 2012.11.1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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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양아들의 ‘대모(代母)’ 조병국 박사

어린 시절 한 소녀가 있었다. 어린 시절 손아래동생 병화와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동생의 죽음을 원인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소녀. 그래서 이 땅에서 돈이 없거나 이유도 모른 채 어이없는 죽음을 맞지 않게 하겠다는 꿈을 꾼 소녀.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사망한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피난길에 올랐던 소녀는 의사가 돼 평생 인술을 베풀며 살았다. 여기에 더해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해 일생을 봉사와 희생으로 살아온 이. 바로 ‘입양아들의 대모’로 일컬어지는 조병국 박사다.
 
소아과 전문의 취득 후 그가 선택한 곳은 서울특별시시립아동병원(현 서울특별시시립어린이병원). 1962년 부모에게서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청진기를 든 그는 1974년까지 그곳에서 성심을 다해 버려진 아이들을 치료한 후 1976년부터 현재까지 일산 탄현의 홀트복지타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풀타임 의료진으로 일하고 있다.

16일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만난 조병국 박사는 “가정이 제대로 서야 버려지는 아이들이 없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열악한 의료시설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죽어나갔죠. 이렇게 죽어서 버려지느니 입양기관에 가서 해외입양이라도 되면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녹번동에 있는 ‘홀트씨양자회’(현 홀트아동복지회)에 아이들을 보냈고 그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다가 그게 인연이 돼 지금까지 여기서 일하고 있습니다.”

아동병원 재직 시 조 박사는 시청은 물론 청와대에서도 ‘눈엣가시’였다. 최초의 병원 여 과장이었던 그는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주한외교사절의 한 부인에게 지원을 요청해 병원확충을 시도했다.

하지만 꿈도 잠시, 종로구 사직동에 위치했던 아동병원 확충은 불가능했다. 병원 확충을 위해서는 동네주민들의 식수를 제공하는 양수기 위치는 물론 사직단까지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를 위해 병원을 찾은 주한외교사절 부인들과 잦은 접촉을 했던 조 박사의 행보는 당시 청와대 민정반에까지 보고됐다. 병원을 찾아온 청와대 민정반 인사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들에게 손 벌리고 다닌다고 문제를 삼는데 울다가 죽으면 버려지는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불평불만이 많은 여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위에 제대로 보고해라.”

하지만 조 박사와 아동병원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고 만다. 청와대 민정반 인사 방문 후 당시 보건사회부에서 병원 측에 ‘외국인들에게 손 벌리지 말라’는 공문을 송부했기 때문. 이에 조 박사는 홀트아동복지회 부속의원으로 자리를 옮겨 고아와 입양아들의 건강을 보살피고 있다.

“아기가 죽으면 너무 불쌍해요. 어른들은 살아볼 만큼 살았지만…. 돈이 없어 부모에게 버림을 받은 아이들이 양부모의 도움으로 살 수 있다면, 또 설령 죽더라도 땅에 묻히기 전까지는 보살핌을 받고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었어요.”

조병국 박사가 홀트부소의원에서 진료를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미국으로 입양된 후 서른다섯 번 수술대에 올랐지만 기적처럼 생존한 입양아가 자신의 양부모와 함께 조 박사를 찾아왔다. 그는 아동병원 재직 당시 그 아이를 미국 사회사업가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시켰다.
 
이들은 3주간 여기서 봉사활동을 한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구개파열(언청이)에 심장병까지 앓았지만 양부모들의 도움으로 살아나 지금은 자신과 같은 구개파열을 입은 환자를 보살피는 언어치료사로 일하고 있다.

“한국에 와서 그 아이는 결국 친부모를 찾았죠. 왜 아동병원에 버렸냐고 물었더니 다른 형제가 있어 치료할 돈이 없어 버렸다고 하더군요. 그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간 사회사업가가 입양 당시 상황을 녹음했더군요. 그가 ‘이런 아이를 입양시킬 수 있나’라고 물었는데 내가 ‘Why not?’이라고 답변했대요. 녹음내용을 미국 양부모가 들려주더군요.”

입양아들에게는 누구보다도 고맙고 은혜로운 ‘어머니’ 조 박사. 그는 “과거에는 양육할 수 없어 아이들을 버렸지만 지금은 책임감이 없어 아이를 버리는 것 같다”며 “가임연령이 되면 스스로 책임감을 가져야한다”고 말했다.

또 “가정에서 아이들이 부모에게 사랑을 받으며 커야 하는데 맞벌이 등으로 인해 아이들이 방치되고 있다”며 “술로 인해 야기되는 아버지의 가정폭력 등이 사라져야 미혼모 문제 등이 해결될 수 있다”고 일갈했다.

부족한 의료기구를 얻기 위해 세계구호단체 등에 수천 통의 편지를 보내야 했던 조 박사. 그래서 그는 ‘국제거지’ ‘불평불만이 많은 여자’라는 별명을 등에 지고 살았다. 하지만 숱한 영아들의 사망진단서를 써내려가며 이 길만이 아이들을 살릴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후회하지 않았다.

조병국 박사는 “홀트일산복지타운은 사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좋은 곳”이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2010년부터 조 박사는 말리홀트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장과 함께 홀트일산복지타운 내 ‘말리의 집’에서 살고 있다. 2006년 골절상을 당한 후 이동에 어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방 하나 내 달라’는 조 원장의 부탁을 말리홀트 이사장은 흔쾌히 수용했다.

11월 늦가을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만난 조 박사는 빨갛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며 “이곳은 사계절을 다 느낄 수 있는, 참 좋은 곳”이라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이 평생을 변함없이 인생에 순응하며 아이들을 보살핀 그에게 주어진 아주 작은 선물이자 아름다운 휴식이 아닐까 싶었다. 단풍을 뒤로 ‘말리의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참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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