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치료나 완화의료냐, 그것이 문제로다
연명치료나 완화의료냐, 그것이 문제로다
  • 신민우 기자 (smw@k-health.com)
  • 승인 2016.01.1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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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우 기자의 ‘불타는 금요일 뜨거운 보건이슈’] 누군가 영화 ‘이미테이션게임’을 말할 때마다 제 머릿 속을 채우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배우 키이라 나이틀리 말고요. 물론 그 미모가 뇌리에 선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인공 앨런 튜링은 연합군에게 독일군 암호체계분석을 지시 받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성공하지만 곧 윤리적 딜레마에 부딪힙니다. 동료의 친형이 탄 아군수송선에 대한 독일공습을 알게된 거죠. 동료는 당연히 이 정보를 이용해 방어하자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암호가 간파됐다는 사실을 안 독일이 암호체계를 바꿀 것이 뻔했습니다. 결국 앨런이 수송선침몰을 지켜보자고 결정하자 동료는 절규합니다. “너는 신이 아냐. 누가 죽고 살지 결정할 수 없다고!”

▲ 영화 ‘이미테이션게임’의 주인공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은 전쟁 속에서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합니다. 이 딜레마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 정도 영화홍보면 베니와 사진 한 장 찍을 수 있겠죠?(사진= 영화 ‘이미테이션게임’ 스틸컷)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화두(話頭) 하나 던지겠습니다. ‘죽음’이란 뭘까요? 더 나아가 ‘타인의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필요할까요? 영화는 2차세계대전이 배경이지만 이 질문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행 중입니다. ‘불타는 금요일 뜨거운 보건이슈’ 세 번째 이야기, ‘웰다잉법’입니다. 이 주제는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핫! 핫! 합니다.

지난 8일 국회 본회의에서 ‘호스피스ㆍ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습니다. 이 법안은 임종환자에 대한 무의미한 치료를 멈출 수 있도록 보장합니다. 환자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웰다잉법’ ‘존엄사법’으로도 불리죠.

법안배경을 설명하려면 1997년 ‘보라매병원사건’부터 되짚어야 합니다. 당시 응급수술을 받은 환자의 아내가 경제적 이유로 퇴원을 요구했습니다. 만류하던 의료진도 귀가서약서를 받은 후 결국 집으로 돌려보냈고요. 오래 지나지 않아 환자가 사망하자 부인은 살인혐의, 의료진 2명은 살인죄 공범으로 기소됐습니다.

▲ ‘보라매병원사건’ 이후 연명의료중단이 불법으로 인식되면서 의사들은 환자가 사망할 때까지 모든 치료를 다했습니다. 물론 치료비는 환자가족의 몫이었습니다.(사진= 서울특별시 보라매병원 홈페이지)

이 판결의 핵심이 뭘까요? 판사는 “경제적 이유, 다른 이해관계에 따라 의사가 환자치료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뒤 의사들은 회복가능 여부를 떠나 환자사망 직전까지 모든 치료를 다했습니다. 치료비부담은 환자가족 몫으로 돌아갔고요.

존엄사논쟁은 2008년 ‘김 할머니사건’으로 새 국면을 맞습니다. 조직검사 중 과다출혈로 식물인간이 된 김 할머니에 대해 보호자가 연명의료중단을 요구했지만 병원은 거절했습니다. ‘보라매병원 사건’ 영향이 여전히 남아있던 겁니다. 다만 병원도 연명의료를 중단했다가 비슷한 요청이 빗발치리라 생각했습니다. 법원이 명쾌하게 기준을 정해달라는 입장이었죠.

3심까지 이어진 소송에서 대법원은 “회복불가능한 사망단계에 이른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가치·행복추구권에 기초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걸로 인정되는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명의료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쉽게 말해 “환자가 원하거나 원한다고 판단되면 연명의료를 멈출 수 있다”는 거죠. ‘보라매병원 사건’과는 사뭇 상반되는 결과입니다. 할머니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후에도 스스로 호흡하다 2010년 1월 별세했습니다.

‘김 할머니사건’은 연명의료중단 논쟁이 본격 시작되는 계기였습니다. 2013년 의료계·법조계·종교계·윤리학계 등 사회 각계각층이 모인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서 관련 권고안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국회 역시 경쟁하듯이 관련법안 7개를 발의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 법안들은 하나로 병합돼 지금의 모습으로 갖춰졌습니다.

▲ 국회에서 발의된 연명의료 관련 7개 법안입니다. 이들이 병합된 ‘7단 합체’ 존엄사법은 지난 8일 통과됐습니다.

법안이 발효되는 2018년부터 19세 이상 성인은 곧 설치될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할 수 있습니다. 임종단계에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의견을 문서화하는 거죠.

의향서가 있는 환자가 임종선고를 받았을 때 담당의사는 본인의견을 다시 물어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 있습니다. 의향서가 없는 환자가 의식이 없을 때는 어떡하냐고요? 논쟁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경우 가족 2명이 “환자가 평소 연명의료를 원치 않았다”는 증언을 하면 담당의사가 확인 후 연명의료를 멈추게 됩니다. 

‘이미테이션 게임’ 속 동료의 절규, 기억하시나요? 가물가물하면 손가락 몇 번만 움직여 다시 확인하면 됩니다. 너무 자책하지는 마세요. 윤리 상 본인조차 포기하면 안되는 게 생명입니다. 하물며 타인이 환자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갖다니요. 다만 몇 가지 전제를 깔아봅시다. 회복이 아니라 단순생명연장만이 치료목적이라면? 치료자체가 환자를 고통스럽게 만든다면? 가족들까지 정신·육체·경제적 고통을 받는다면? 과연 임종을 앞둔 환자를 무조건 치료해야 하나요? 문제는 복잡해집니다.

물론 존엄사법은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를 당장 사망에 이르게 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의미 없는 치료를 멈추고 완화의료를 통해 통증을 줄임으로써 환자가 자연스럽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게 돕는 거죠. 일정기준에 맞는 시설·인력을 갖춘 요양병원을 호스피스·완화의료기관으로 지정하려는 내용도 이와 궤를 같이 합니다. 하지만 법안이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남아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성산생명윤리연구소는 “의사전달이 어려운 임종환자에 대한 생명유지중단은 생명존엄·가치의 중대한 훼손인 ‘안락사’를 조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환자단체연합회도 존엄사법 취지를 인정하면서도 “연명의료중단을 남용하는 데 방지책이 강화돼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진술만으로 연명의료를 멈출 수 있다면 치료비용을 감당할 수 없는 보호자가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의료계는 노숙자처럼 연고가 없는 무의식환자에 대해 법적 근거를 명시하라고 주장하고 있어 의견충돌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병원이 비용지불이 어려운 이들에 대한 연명의료를 일방적으로 멈출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옵니다.

법안 통과 전까지 시민단체·윤리학계·종교계 등이 추천한 2명이 이런 결정을 내리는 윤리위원회에 참여해야 한다는 방어조항이 있었지만 지난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심의과정에서 삭제됐습니다. 이 내용이 어떤 모습으로 부활할 지는 지켜봐야겠습니다.

국회에서는 “이 법안으로 환자권리를 높일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보건복지위원회 김재원 의원은 “의료진과 보호자가 암암리에 환자 연명의료중단을 합의하던 관행을 규제할 수 있다”며 “무연고자에 대한 연명의료 역시 이전에는 병원이 임의적으로 중단해왔지만 윤리위원회가 설치되면 이를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논쟁의 초점은 연명의료중단이 아니라 의료진이 환자를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할 수 있느냐입니다. 그 최선이 연명의료중단일지, 생명유지를 위한 치료인지 토론해야 하는 게 올바른 방향일 겁니다.

지금 당장 이 법안이 옳고 그르다는 답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 임종단계에 놓인 환자의 처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현실이 돼야겠죠. 우리가 지금 할 일은 이 철학적인 토론을 통해 보건복지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논쟁이 환자복지 향상을 위함이라 믿습니다.

다만 의사를 비롯한 ‘패널’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고사성어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이 할 일을 모두 한 뒤에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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