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구한 슈퍼히어로도 슬픔앞에 장사없다
지구 구한 슈퍼히어로도 슬픔앞에 장사없다
  • 이원국 기자 (21guk@k-health.com)
  • 승인 2019.11.28 14: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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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아이언맨
‘다중인격장애’ 헐크
‘대인기피증’ 배트맨
‘자기애성성격장애’ 닥터스트레인지

슈퍼히어로영화의 전성시대입니다. 대중은 그들의 영웅적 행동에 열광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그늘진 이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며 보이지 않는 큰 슬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그들의 어두운 정신세계를 질환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해봤습니다. <편집자주>

아이언맨은 PTSD, 헐크는 ‘다중인격장애’를 겪고 있다(그래픽=이희진 기자).
아이언맨은 PTSD, 헐크는 ‘다중인격장애’를 겪고 있다
(그래픽=이희진 기자).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 아이언맨

‘I am a Iron Man’. 아이언맨 시리즈가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 대사에 열광했다. 다른 영웅들과 달리 스스로 당당하게 정체를 공개했기 때문. 이는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실수에 대한 사죄의 의미가 담겨있다.

아이언맨은 테러범들에게 당한 부상 때문에 가슴에 ‘아크리엑터’라는 생명유지장치를 심게 된다. 그리고 납치현장에서 자신이 만든 무기가 세상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 큰 죄책감을 느끼면서 무기생산을 중단하고 아이언맨이라는 영웅의 삶을 걷게 된다. 하지만 납치의 충격 탓일까. 아이언맨은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이하 PTSD)을 겪게 된다.

아이언맨은 다른 영웅과 달리 스스로 평범한 인간임을 인지하고 있다. 그는 여리고 상처받은 마음을 화려하고 단단한 강철슈트 속에 숨기지만 PTSD는 날이 갈수록 악화된다. 결국 그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슈트개발에만 몰두한다. 이를 반영하듯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살이 빠지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PTSD 덕에 타노스로부터 지구를 지켜낸다. 자신의 강박이 옳았다는 것을 희생으로 증명한 셈이다. “이제 모두 끝났어요. 편히 쉬어요”라는 말을 들으며 아이언맨은 눈을 감는다. 숨을 거둔 그의 표정은 참으로 아늑하면서도 고요했다.

두 번의 죽을 고비, 그리고 수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모두를 지키려 했던 아이언맨. 우리가 그에게 감동을 받은 것은 단지 찬란한 슈트 때문이 아니다. 한 명의 연약한 인간이 주변사람을 지키기 위해 아픔을 극복하고 이겨낸 그의 서사시에 공감해서다.

가톨릭관동대 국제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기선완 교수는 “PTSD는 전쟁처럼 심각한 사건을 경험한 후 이에 공포감을 느끼고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정상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질환”이라며 “아이언맨은 불안감, 환청, 공황발작, 우울증 등 전형적인 PTSD증상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다중인격장애’ 헐크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또 다른 내가 나 자신이 원치 않는 흉폭한 짓을 저지른다면? 자신이 원치 않은 힘을 가져 오히려 평생 고통 받는 영웅이 바로 녹색괴물 ‘혈크’다.

헐크는 본명은 브루스배너다. 과학자였던 브루스배너는 감마폭탄을 연구하던 중 급작스런 폭발로 감사선에 노출된다. 그 결과 분노하면 괴력을 지닌 녹색괴물로 변하게 되는데 브루스배너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사람’이라는 뜻의 ‘헐크(Hulk)’로 이름 짓는다.

브루스배너는 헐크를 혐오한다. 헐크는 다른 영웅과 달리 자신의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는데다 자제력을 잃으면 마구잡이로 날뛰면서 세간에 두려움과 공포를 주기 때문이다. 또 헐크로 변신하면 지능과 인지능력이 떨어져 더욱 흉포해진다. 브루스배너를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녹색괴물로 변할 때 기억을 공유한다는 점이다.

브루스배너는 이 상황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내면에서 헐크가 튀어나오지 않게 노력한다. 그는 분노조절을 위해 요가, 명상 등 정신수련에 매진하지만 쉽지 않다.

헐크는 여러 영웅 중 감정불안요소가 가장 뚜렷하다. 이 점이 작은 일에도 쉽게 분노하는 현대인과 닮아서인지 몰라도 관객들의 공감을 얻는다.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강원섭 교수는 “해리성주체장애로 불리는 다중인격의 경우 한 사람 안에 두 개 이상의 인격이 존재한다”며 “두 인격은 같은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생각패턴이 다르다는 특징을 보이는데 헐크 역시 스트레스 방어기제로 다른 인격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면 다중인격이 틀림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다중인격은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한 경우가 많은데 헐크의 경우 유년기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 때문에 다른 인격이 형성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배트맨은 대인기피증, 닥터스트레인지는 나르시시즘을 겪고 있다(그래픽=이희진 기자).
배트맨은 대인기피증, 닥터스트레인지는 나르시시즘을 겪고 있다
(그래픽=이희진 기자).

 

■‘대인기피증’ 배트맨

세상에는 아이언맨처럼 유쾌한 히어로가 있는가 하면 우울한 히어로도 존재한다. 다크히어로 ‘배트맨’이 대표적이다.

그는 유년기에 눈앞에서 부모가 살해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으면서 삶이 산산조각 난다. 유년기는 부모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자아정체성과 사회화가 형성되는 첫 단계이지만 배트맨의 경우 이 시기에 부모가 살해되면서 정상적 성장이 불가능해진 것.

다행히 그의 곁에는 항상 집사 알프레드가 있었다. 아버지와 같았던 그는 배트맨이 올바른 길을 걷도록 최선을 다한다. 만일 알프레드가 없었다면 배트맨은 어쩌면 고담시 최고의 적인 조커가 돼 시민을 위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의 자아는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낮에는 외출을 피하고 밤이 돼서야 거리를 활보한다. 이 때문에 영화의 톤 자체도 매우 음울하다.

배트맨은 어둠에 집착한다. 옷도 검은색이며 박쥐라는 야행성동물을 상징으로 선택한다. 영화 속에서 그의 웃는 모습을 보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웃어도 환한 웃음이 아니라 냉소가 대부분이다. 또 누군가에게 갖는 애착 자체를 두려워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일하게 사랑했던 레이첼이 조커에게 살해당한 후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을 또다시 잃어버린 배트맨은 우울증까지 생기면서 가면을 어둠 속에 던진 채 집안에 틀어박힌다. 다크히어로가 칠흑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중앙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선미 교수는 “사회불안장애 중 하나인 대인기피증은 두려워하는 상황에 노출되거나 노출이 예상될 때 심각한 불안감을 보이는데 영화 속 배트맨 역시 불안정한 상황에 노출됐을 때 공황발작증상을 보인다”며 “대인기피증환자의 1/3정도가 우울증을 겪기 때문에 반드시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기애성성격장애 ‘닥터 스트레인지’

매력적이며 능력도 있지만 자기과시가 심해 타인의 기분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 이들을 ‘화이트싸이코패스’라고 한다. 화이트싸이코패스는 반사회적 인격장애 중 하나로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질환이 있으니 바로 ‘자기애성성격장애(나르시시즘)’이다.

마블영화 속 자기애성성격장애를 가진 히어로는 단 한 사람뿐이다. 바로 ‘닥터 스트레인지’다. 그는 극 초반 세계 최고의 신경외과전문의로 나온다. 불가능한 수술을 해내는 의사, 거기에 사람을 매료시키는 화려한 언변까지… 하지만 ‘너는 불가능해’라는 상대를 깔보는 듯한 말로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어느날 그는 사고를 당해 외과의의 생명인 손을 잃게 되면서 크게 절망했지만 타인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지 않는다. 자기애가 지나치게 강하다 보니 남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료방법을 찾던 닥터 스트레인지는 카마르타지라는 곳에서 수행하게 된다. 수행 도중에도 성격 탓에 크고 작은 각종 트러블이 발생한다. 차원이 높은 경지에 올라도 여전히 사람을 깔보기 일쑤이다 보니 결국 스승에게 ‘겸손하라’는 말까지 듣게 된다.

우리가 히어로무비에 열광하는 이유는 완벽해 보이는 그들의 성장과정에 평범한 우리의 모습이 투영됐기 때문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거대한 힘 앞에 굴복할 뻔했지만 계속 도전하면서 이를 극복하고 그 과정에서 비로소 겸손의 미덕을 배우게 된다.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강동우 교수는 “자기애성성격장애는 일반적으로 능력 있는 권위자에게서 많이 보이는 모습”이라며 “기본적으로 자기애가 너무 강해 어떤 실수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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