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수 교수의 흉부외과 바로알기] 흉부외과 역사 기록으로 ‘숨’ 불어넣기
[이성수 교수의 흉부외과 바로알기] 흉부외과 역사 기록으로 ‘숨’ 불어넣기
  • 이성수 강남세브란스병원 흉부외과 교수ㅣ정리·장인선 기자 (insun@k-health.com)
  • 승인 2023.05.0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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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수 강남세브란스병원 흉부외과 교수

우리나라 최초로 흉부외과수술을 받은 환자가 누구인지 생각해본 적 있는가. 아마 답을 듣고 나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바로 을사오적의 한 명인 이완용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발생한 ‘이완용 암살 미수사건’을 통해 한국사 최초의 흉부외과 관련 기록을 볼 수 있다. 

사건은 1909년 12월 22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21세 청년 이재명은 오전 10시 종현성당(현재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총영사 주최로 열린 벨기에 황제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이완용에게 다가가 암살을 시도한다. 이재명의 칼은 이완용의 왼쪽 어깨와 등을 뚫고 폐를 관통했다. 

이재명은 체포돼 잡혀가는 순간에도 목적을 달성했다고 믿고 있었지만 이완용의 명을 끊지는 못했다. 이완용은 많은 출혈로 위중한 상태였지만 다음날 대한의원에서 수술받고 회복돼 53일 만에 퇴원했다. 이재명은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았고 다음 해 결국 사형됐다. 

이완용의 상처와 수술과정은 이완용 암살 미수사건의 재판과정에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일본인 의사가 작성한 ‘감정서’를 보면 ‘좌견갑골 내측 자창이 폭 7cm, 깊이 6cm 였으며 제 2,3늑간을 자통하면서 늑간 동맥을 절단해 과다출혈을 일으키고 폐를 손상했으며 창공으로부터 출혈 및 호흡에 수반된 공기출입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창상을 치료해 회복됐다는 기록과 함께 수술 후 한 달이 지난 후 호흡음이 미약해 천자술을 시행했는데 혈성 장액을 700 mL나 제거했다고 써 있다. 비록 일제강점기 일본인 의사에 의한 기록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흉부자상과 흉부외과수술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흉부외과 의사에 의한 폐수술 기록은 고병간 교수에 의해 시작됐다. 고병간 교수는 1948년 10월 6일 국립 마산 결핵요양소에서 폐결핵환자에게 흉곽성형술을 최초로 시행한 바 있으며 1949년 5월 5일과 1949년 6월 7일에 대구의대에서 국내 최초로 폐결핵환자에 대한 전폐전제술을 국소마취하에 성공했음을 보고했다. 

무엇보다 필자는 이 수술이 모두 국소마취로 실시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흉곽성형술은 폐절제술이 발달된 현재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과거에는 폐결핵환자에서 결핵부위의 폐를 허탈시켜 치료하던 방법이었다. 

흉곽성형술은 흉부 X-선이 발견되기 10년 전인 1885년 드 세렌빌(de Cerenville)에 의해 처음 시도됐으며 독일의 페르디난트 자우어브루흐(Ferdinand Sauerbruch, 1875-1951)에 의해 발전했다. 자우어브루흐 교수의 문하생이 일본의사 도리가다(島瀉)였고 이 도리가다의 제자가 고병간 교수이며 고병간 교수의 문하생이 세브란스병원 출신의 유승화 교수와 이성행 교수이다. 

고병간·유승화·이성행 교수는 공주결핵요양원, 마산 결핵병원, 이대병원, 대구의대병원, 또는 선교사가 세운 여러 병원 등에서 단독 또는 협력해 폐결핵환자에 대한 흉곽성형술, 폐절제술, 전폐절제술 등을 국소마취하에 시행함으로써 우리나라 흉부외과의 선구자가 됐다.

항상 역사라는 것이 그렇듯 기록에 의존해 정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언론사 기록이 있어도 잊힐 수밖에 없다. 

의과대학 졸업동기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비뇨의학과교실 홍창희 교수는 의사학과 겸임교수로서 남들이 잘 안 하는 소중한 우리나라 의사학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 

그에게 흉부외과수술의 역사를 문의했더니 김준엽이라는 분을 알려줬다. 그는 1907년 황해도 해주출생으로 1928년 동경외국어학교 노어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베를린의대를 졸업한 후 앞서 언급한 독일의 자우어브루흐 교수의 수제자로서 양압환경하에서의 폐수술에 대한 수련을 받고 1945년 귀국, 서울여자의과대학 외과과장을 역임했다. 

그는 1947년 11월 3명의 결핵환자의 폐엽절제술을 연속 성공했다. 하지만 1948년 3월 17일 평화일보에 기록된 주변 의학계 반응은 “다른 나라에서는 결핵폐의 절제를 하다가 그만 두었다지” “ 폐를 수술하다니, 폐라는 것은 혈관이 많고 하여 수술 못하는 기관입니다. 아마 다른 걸 수술하고 폐수술했다는 것이겠지” 등이었다. 아쉽게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8월에 납북된 후 더 이상 그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대한심장혈관흉부외과학회에는 역사기록위원회가 있다. 필자가 존경하는 가천의대 박국양 교수님께서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이에 흉부외과에도 역사학자(Historian)가 있어야 한다며 일찍이 역사기록 및 보존위원회를 만드셨다. 

필자는 역사기록부위원장으로서 2015년 ‘흉부외과 백서-성장과 전망’과 2018년 흉부외과학회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사진과 함께 보는 대한민국 흉부외과 역사’ 발간에 참여했다. 모두 대한심장혈관흉부외과학회 홈페이지 학회자료에서 다운받아 볼 수 있다. 

하루하루 너무너무 바쁜 흉부외과이지만 그 과정을 기록해두는 것은 흉부외과 발전에도 큰 의미가 있다. 역사기록부위원장으로서 우리 역사기록위원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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