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속앓이 키우는 만성골반통
여성 속앓이 키우는 만성골반통
  • 허주엽 대한만성골반통학회장,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
  • 승인 2012.06.2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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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느끼는 통증은 매우 주관적이다. 그 양과 질을 객관적으로 측정하기가 어렵다. 비슷한 수준의 통증 유발 요인이 작용해도 어떤 사람은 가볍게 느낄 수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죽을 듯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환자의 호소가 과장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만성 통증은 종종 참을성이 부족하다거나, 심지어 꾀병으로 간주되기까지 한다.

최근 결혼한 지 20여년이 된 직장여성 이모씨(48)가 외래로 찾아왔다. 이씨는 4~5년 전부터 골반과 아랫배, 허리 부위에 은근한 통증이 생겨 고생이 상당했다. 최근에는 가끔 분비물이 많아지고, 출혈도 있었다. 그동안 증상에 따른 이런저런 검사도 몇 차례 받았지만 특별한 이유를 밝혀내지 못했다. 지속적인 통증뿐 아니라 늘 골이 무겁고, 기운이 빠지며 우울한 증상까지 생겨났다.

이씨는 10대 중반과 20대 초반의 자녀를 두었다. 남편은 전형적인 가부장적 특성을 보여 아내가 아프면 하루 이틀은 걱정을 하다가도 2~3일이 지나면 짜증을 부린다. 그러니 남편에게 제대로 얘기도 못한 채 아프고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직장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몇 년 전부터 시댁 문제로 울화병 증세도 생겼다고 호소했다.

만성골반통을 의심하고 자세한 문진에 이어 정밀검사를 해보니 자궁내막증과 골반울혈증구군이 진단됐다. 이 두 가지는 만성골반통의 대표적인 원인이다. 이씨는 현재 약물치료를 시행 중이다. 증세가 심하거나, 약물치료가 효과가 없으면 수술을 고려해야 하는 질환이다.

만성골반통은 뚜렷한 병인 없이 허리·골반·외음부 통증이 6개월 이상 계속되는 병이다. 산부인과를 찾는 환자의 10∼20%를 차지할 만큼 흔한 질환이지만 대부분 증상의 원인을 찾지 못해 진통제만 복용하면서 병을 키우기 일쑤다. 자궁과 골반 주변부는 피부에 비해 신경이 적게 분포돼 있기 때문에 통증의 국소화가 되지 않아 통증을 느끼는 부위가 모호하고, 이런 부위에서 발병한 질환에 대한 진단이 쉽지 않다.

만성골반통은 배꼽 아래 하복부에 묵직한 둔통이 있고, 꼬리뼈나 양쪽 허리 통증이 대표적인 증상이다. 골반통 환자의 약 90%가 요통 증상을 보이고 방광 자극, 배뇨 시 통증 등 방광 증상도 80%에서 나타난다. 이 밖에 성교통이나 월경통, 비정상 자궁출혈, 질 분비물 증가, 과민성대장증상(설사 복통 변비), 두통, 불면증 등도 호소한다.

증상만큼 원인도 다양하다. 가장 흔한 것은 부인과 질환이다. 자궁내막증과 골반울혈증후군이 대표적이다. 자궁내막증은 월경 때 역류되는 월경혈에 의해 자궁내막 절편이 자궁 이외 장소에서 자라면서 월경 과다와 심한 월경통 및 자궁의 부정기적인 출혈을 일으킨다.

골반울혈증후군은 정맥 내의 혈류가 심장 방향으로 흐르게 도와주는 정맥 판막이 선천적으로 이상하거나 출산 등으로 손상돼 나타난다. 서 있거나 허리를 구부릴 때 정맥이 하부로 역류해 부풀어 오르면서 자궁 및 난소 주변부에 울혈(피가 몰려 있는 증상)을 일으켜 통증을 야기한다.

남편의 외도나 폭언, 술버릇, 시가와의 갈등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만성골반통의 원인으로, 심하면 우울증까지 유발한다. 여성이 스트레스 상황을 맞으면 자궁이 비정상적으로 수축하고, 이로 인해 자궁 내 혈액이 정체돼 울혈 상태가 되거나 생리혈이 골반강이나 자궁 근육층으로 역류해 통증을 일으킨다. 이것을 방치하면 만성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여성들은 상당수가 우울증에 시달린다.

이씨의 경우처럼 아프긴 한데 병원에서 아무 이상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해 듣고, 남편이나 아이들까지 이것을 이해해 주지 못하면 여성의 마음에는 한(恨)이 생긴다. 귀한 딸로 자랐을 여성이 남성중심적인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직장까지 다니면서 원인을 알지 못하는 통증으로 계속 고생한다면 마음의 병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진료 마지막에 가서는 설움을 참지 못하는 듯 눈물까지 흘리는 환자의 얘기를 들어주는 동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내의 아픈 몸에 대한 남편들의 관심과 이해가 더 커져야 한다.

<허주엽 대한만성골반통학회장,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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