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의 허기, 분리불안증
애착의 허기, 분리불안증
  • 경향신문
  • 승인 2012.03.1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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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궁은 태아에게 가장 안락한 공간이다. 세상으로 나오기 전까지 최적의 생존 환경을 제공한다. 외부 감염과 충격을 거의 완벽하게 막아준다. 이처럼 안전하고 쾌적한 공간을 박차고 나오는 것이 인간의 출생이다. 프로이트는 “출생은 불안의 근원이자 원형”이라고 말했다. 

불면증으로 내원한 40대 주부. 결혼 초부터 10년 넘게 호전과 악화가 반복된다. 환자는 “남편이 출장간 뒤 아이와 혼자 있던 날 밤 불면증이 시작됐다”면서 “태풍이 너무 무서웠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남편과 떨어져 지내면 그때 기억이 생생해 불면증이 심해졌다. 가슴도 두근거리고 이유 모를 불안에 휩싸인다. 출장이 길어지면 결국 아이들에게 심하게 화까지 낸다. 남편에게 아예 출장을 가지 말라고 종용할 정도다. 남편이 탄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끔찍하다. 자상한 남편은 그때마다 환자를 달래느라 애를 먹는다. 해외에서도 전화로 환자를 달래느라 일을 제대로 못 볼 지경이다. 그러나 남편과 사소한 말다툼이라도 하는 날에는 증상이 심해진다. 혈압이 올라가 심장이 멎을 것 같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혈압부터 체크한다.

환자는 이런 불안과 불면증이 무서웠던 밤의 기억과 실제 비행기 사고를 목격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환자의 증상은 성인의 ‘분리불안증’이다. 이 증상은 흔히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만 떠올리지만, 성인 심지어는 노인층에서도 나타난다. 몸은 성인이어도 정신의 일부는 아직 엄마의 자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불면, 불안, 혈압상승 등은 모두 분리불안에서 시작된 것이며, 관심과 보호받아야 하는 좋은 명분이 된다.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몸은 분리되었어도, 정신까지 성공적으로 분리된 것은 아니다. 출생 이후 만 3세까지 적절한 애착관계를 통해 정신은 서서히 엄마와 분리된다. 신체적 독립은 출생을 통해 갑작스럽게 이뤄지지만, 정신적 독립은 연착륙되어야 한다.

그런데 부모의 과보호로 독립 시기를 아예 놓치거나, 반대로 너무 이른 시기에 독립을 종용당하면 분리불안이 생긴다. 출산 직후 제1 보호자가 자주 바뀌거나, 눈맞춤이나 신체접촉 등이 너무 적은 것도 원인이다.

모든 생명체의 초기 성숙은 ‘애착’에서부터 시작된다. 애착이 충분히 형성되고 난 뒤에야 성숙해질 수 있다. 인간 역시 애착 욕구를 충족시키면, 분리된 존재로서 홀로 잠들거나 학교 가는 일과 같은 ‘분리’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환자는 친정 엄마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했다. 어릴 적 부모 사이가 좋지 않았던 환자는 “엄마가 따뜻하게 웃어주던 기억이라곤 없다. 보채면 늘 화내며 떼어놓기 일쑤였다”고 회상했다.

애착의 허기다. 신체적 굶주림과 마찬가지로 애착에 대한 굶주림이 심했다. 애착은 매우 끈질긴 생존 본능이다. 엄마가 밀쳐낼수록 더 다가가려는 아이의 마음처럼, 안전하다 믿고 신뢰한 대상과는 결코 떨어지지 않으려 필사적이다.

그 대상이 지금은 남편으로 전환된 것뿐이다. 나이가 더 들면 남편에게서 자식에게로, 때로는 종교나 특정 취미로도 전환된다. 환자 역시 “요즘은 아이들이 캠프를 가도 잠이 안 온다”고 호소했다.

다행히 성인기 분리불안을 안정시키는 치료로 증세는 호전되었다. 환자는 “부부싸움 후엔 늘 남편 원망부터 했는데, 결국 내 불안을 남편에게 투정부렸던 셈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40년 넘게 유예되어온 독립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그 은밀한 자궁에서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남은 삶은 불안의 연속이라는 더 큰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강용혁| 분당 마음자리 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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