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아이를 믿고 내버려 두어라
가끔은 아이를 믿고 내버려 두어라
  • 강용혁 분당 마음자리 한의원장
  • 승인 2012.04.27 1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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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남녀 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너무 가까워 질식할 것 같다면 사랑이 아니다. 집착이나 불안의 또 다른 포장이다. 

우울증으로 내원한 여중생. 엄마는 “아이가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며 다급한 표정이다. 귀가 후 방안에서 멍하니 혼자 벽만 쳐다본다. 엄마는 처음엔 공부가 힘들어 그냥 하는 말로 넘겼다. 그러나 저러다 무슨 일이 생길까 하루 종일 불안하다.

교무실에 불려온 죄인처럼 아이는 “그냥…”이라며 속내를 감춘다. 대신 엄마는 성적이 떨어졌고, 친구들과 늦게까지 어울리고, 담배를 피우다 걸렸고 부쩍 멋내는 것까지 아이의 최근 일탈을 꼼꼼히 짚어낸다. 엄마는 “지적하면 화를 내고 물건을 던지기까지 한다”면서 “내가 알던 딸이 아닌 것 같다”고 답답해했다.

그러나 우울증의 원인은 엄마와의 관계였다. 아이는 “성적이 떨어진 것보다 한번 떨어지면 나오는 엄마의 연이은 지적이 더 무섭다”고 말했다. 그게 싫어 엄마로부터 조금 떨어질려 하면 생활태도를 놓고 엄마는 더 옥죈다. 아이는 “잠시 음악만 듣고 있어도 ‘언제 공부하느냐’며 따지신다”고 말한다. 귀가가 왜 늦었느냐, 무얼 하다 늦었느냐, 어떤 친구를 만났느냐, 공부는 잘하는 친구냐 등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엄마 입장에선 관심인데, 아이는 질식할 것 같다. 그럴수록 아이는 더 자극이 큰 일탈을 원하고 결국 죽고 싶다는 충동까지 생긴다.

반면, 달라진 아이 모습에 엄마는 조급하고 불안해져 더 참견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엄마도 아이도 소음인이다. 머릿속 정답은 한 가지뿐이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를 수용하기보다 정답대로 되어져야 하고 되어지지 않으면 강박적으로 바꾸려 든다. 그것도 당장이다. 감정적 배려는 없이 옳고 그름의 답만 전하려 한다.

소음인의 이런 불안과 조급증은 주변을 지치게 만든다. 아이 역시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 아닌 불신과 감시로 여긴다. 그래서 도망치고 더 엇나가고 싶다. 원래 궤도로 돌려놓기 위해선 아이보다 엄마가 먼저 변해야 한다.

그러자 엄마는 “잘못된 길로 가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인가”라고 반박한다. 엄마에게 “그렇다면 24시간 내내 쫓아다니며 감시할 수는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일탈 여부는 결국 아이의 선택이다. 하지 않을 일탈도 반발심에 더 할 수도 있다. 아이 귀에는 전혀 효력 없는 훈계보다는 차라리 진심으로 믿어주고 기다려주면 돌아온다.

엄마는 “외동딸이라 명품만 입혀 키웠는데 왜 이렇게 속썩이는지 모르겠다”고 원망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아이 마음을 되돌리기 더 어렵게 만든다. 예전에도 지금도 엄마의 개입은 언제나 아이를 위한 것일까. 아이들은 명품 유모차나 성대한 호텔 돌잔치를 요구한 적도 없다. 대부분 타인을 의식한 엄마들의 이기적 선택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공감’과 스스로의 판단으로 숨쉴 작은 공간을 원한다. 반면, 부모들은 그저 ‘정답’만 찾는다. 그 간극을 해소하는 것이 우울증 치료의 관건이다.

변해야 할 건 아이가 아니라 부모다. 아이를 변화시켜 답을 찾겠다는 부모들의 조급한 시각이 바뀌지 않으면 약을 써도 차도가 없다. 때로는 백마디 말보다 관심은 갖되 믿고 내버려두는 것도 지극한 사랑이다. 그래서 비틀즈도 ‘렛잇비(Let it be)’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내가 힘들 때 어머니는 내게 말한다/ 내버려두어라/ 어둠 앞에서도 어머니는 지혜롭게 속삭인다/ 내버려두어라/ 그곳에 답이 있을 거야/ 구름 낀 깜깜한 밤에도/ 한 줄기 빛은 여전히 나를 비출 테니/ 내일까지도 이어질 테니/ 걱정 말고 내버려두어라/ 제발, 내버려두어라.”

<강용혁 분당 마음자리 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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