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사랑’은 화병의 근원
‘억지 사랑’은 화병의 근원
  • 강용혁 | 분당 마음자리한의원장
  • 승인 2012.06.21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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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하는 간절함은 아름답다. 그러나 신이나 절대자와의 감응 이전에 자신의 내면이 수긍할 수 없는 기도는 자신을 행복 대신 고통으로 몰아간다. 

화병으로 내원한 60대 여성. “가슴이 벌렁거려서 잠시도 진정이 안된다”고 호소한다. 또 “신나게 노래를 부르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난다”며 “매일 기도를 했지만 소용이 없다”고 말한다. 오랜 가족 갈등 때문이었다. 환자의 지난 삶은 한 편의 대하소설이다.

혼자 어렵게 키웠으니 아들 덕 좀 봐야겠다는 시어머니로부터 혹독한 시집살이를 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씀씀이가 큰 시어머니에, 도박중독에 빠진 시동생, 청상과부가 된 시누이 가족까지 모두 거둬야 했다.

태음인인 환자는 모든 걸 자신의 탓인 양 묵묵히 참기만 했다. 장남인 남편은 시어머니의 태도나 대식구 부양을 당연하게만 여겼다.

환자는 “그렇게 힘들게 일만 했지 정작 나를 위해서는 써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작년에도 집이 좁아 시댁 전셋집을 옮기느라 남편은 아들의 결혼 적금마저 깨서 줬다. 막상 집들이를 가보니 최신형 TV가 3대씩이나 있는 걸 보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어떤 약으로도 진정이 안됐다.

이후 마음을 달래려 노래교실도 다니고 매일같이 기도에 몰두했다. “주여, 이 사람들이 다 바뀔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만약 그게 안된다면 제가 사랑으로 다 품을 수 있게 해주세요.” 지극히 태음인다운 기도다.

자신이 감당할 것과 못할 것에 대한 구분이 없다. 자신이 피해자여도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대충 뭉뚱그려 넘어가려 한다. 화병은 가족들 탓도 있지만, 환자의 이런 성정이 더 키웠다.

바꿀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지혜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감히 바꾸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환자의 기도는 바뀔 수 없는 바람들뿐이다. 100억원짜리 복권 당첨 기도나 마찬가지다.

과연 남편과 시댁 식구들을 바꿀 수 있을까. 아니 바뀔 이유가 없다. 그들 입장에선 최적의 삶을 살아왔다.

아흔 넘도록 며느리에게 여전히 큰소리치며 아들 덕을 본 시어머니나, 힘들게 일하기보다 형에게 의존해 수십년을 살아온 그들에겐 지극히 편리한 선택이다. 또 효자 아들에 좋은 형과 오빠라는 칭송이 아내의 고통보다 더 중요한 남편의 가치관 역시 바뀌기 어렵다. 오직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무시하고 억압해온 환자만 이 상황이 불만족스러울 뿐이다. 결국 바뀔 수 있는 건 환자 자신뿐이다.

하루아침에 사랑으로 품게 해달라는 기도 역시 이뤄지기 힘들다. 종교의 힘으로 억압하는 것이며 인간이 아닌 신이 되길 바라는 기도다.

다른 가족들 입장을 역지사지해보는 것이 환자가 할 수 있는 용서의 전부다. 굳이 억지 사랑으로 품으려 애쓰지 말아야 한다. 그런 애씀이 바로 화병의 원인이다. 분노를 속으로 삭이느라 더 울컥거리는 가족에 대한 원망에서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치료의 관건이다.

환자에게 가장 모진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음을 이해한 뒤로 약물치료 효과도 빠르게 나타났다. 섣부른 용서보다 감사 기도가 우선이다.

이토록 모질게 굴었음에도 잘 버텨준 자기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박수부터 쳐야 한다. 가족들 행동에 일일이 마음을 쓰기보다, 이제부턴 나 자신에게 최고 좋은 것을 주겠다는 반성의 기도로 바뀌어야 한다.

일찍이 시인 타고르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는 기도보다, 위험에 처해서도 겁내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참다운 기도”라고 말했다. 과거의 상처가 한꺼번에 사라지길 원하는 기도는 허망한 응답으로 돌아온다. 하루하루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부터 일으켜야 순간순간 누리며 살 수 있다.

<강용혁 | 분당 마음자리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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