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肝) 보는 의사 한광협의 청진기] ‘싸늘한 의사’들의 변명
[간(肝) 보는 의사 한광협의 청진기] ‘싸늘한 의사’들의 변명
  • 한광협 한국보건의료연구원장ㅣ정리·한정선 기자 (fk0824@k-health.com)
  • 승인 2021.05.2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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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광협 한국보건의료연구원장

최근 ‘말기암 환자를 울린 싸늘한 의사들’이라는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환자는 4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암 진단을 받고 치료가 어렵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희망과 위로’의 얘기를 듣고자 여러 병원을 방문했지만 싸늘하고 비관적인 답변만 듣고 절망했다는 얘기다.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환자에게 헛된 희망을 주는 것이 희망고문이 될 수 있을 뿐더러 냉정하게 경고하지 않았을 때의 법적 문제에 대비해 방어적 태도를 취한다. 또 3분이라는 짧은 진료시간 내에 환자 입장을 충분히 공감하고 따뜻한 위로를 전달하기 쉽지 않은 현실이기도 하다. 

필자는 간암환자들을 진료했던 의사로서 다른 병원에서 이미 치료가 어려워 시한부판정을 받은 환자와 마주한 경험이 적지 않다. 그들의 절박감을 공감하고 환자의 자료를 세심히 검토해 치료가 어려운(difficult)지 또는 불가능한(impossible)지를 우선 확인한다.
 
확인이 어려운 경우 추가검사를 통해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환자나 보호자에게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는지 물어보고 사실을 직시할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했다.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저서에서 ‘나이 들어 병드는 과정에서 두 번의 용기가 필요한데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다른 하나는 이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다’라고 했다. 이어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다수 환자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두려움보다 불확실한 희망에 매달린다. 또 때때로 의사들은 남겨진 시간이 얼마 안 되는 환자가 병원에서 헛되이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경우도 많다. 

필자는 불편한 진실을 설명해야 할 때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운명을 가진 시한부인생이며 환자에게 운명의 시간이 예상보다 일찍 왔고 남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 이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환자와 보호자에게 죽음에 대해 말하려면 의사에게도 용기가 필요하다. 침몰하는 배에서 일차적으로 구멍 난 부분을 막아야 하는지(여러 가지 치료 시도), 만일 이것이 불가능할 경우 물을 퍼내며 침몰을 막아야 할지(완화의료 시도), 이조차 의미가 없을 때 마지막 순간에 물만 퍼낼 것인지. 즉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지 선택의 시간이 왔다고 알려준다. 

이때가 마음의 청진기로 환자 내면의 소리를 들을 때다. 참고로 청진기는 차갑다. 싸늘한 의사가 안 되려면 최선을 다해 환자를 치료하고 따뜻한 마음을 보여준 후 죽음의 임박을 알려주는 것이 인간적인 배려이다. 

‘마지막 강의’의 저자 랜디 포시는 췌장암치료에 실패했다는 의사의 선언을 듣고 마지막 강의를 시작했고 저서를 남겨 가족과 많은 이들에게 의미 있는 삶의 메시지를 남겼다. 

스티브 잡스를 포함해 생전에 자신의 삶이 유한한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크로노스의 오랜 시간을 산 사람보다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보내고 갔다. 오래 사는 것도 좋지만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이 더 중요하다. 

싸늘한 의사들에게 상처받은 환자나 가족들에게 이 글이 조금의 위로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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