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약자판기, 11년째 제자리걸음?…추락하는 이카루스의 날개
[기자의 눈] 약자판기, 11년째 제자리걸음?…추락하는 이카루스의 날개
  • 이원국 기자 (21guk@k-health.com)
  • 승인 2023.11.29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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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국 기자
이원국 기자

한 사내가 큰 바위를 어깨에 메고 산 정상까지 오른다. 정상에 도착해 그 바위를 내려놓아 산 아래로 굴러 떨어뜨린다. 사내는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가 다시 돌을 어깨에 메고 산을 오른다. 그는 이 행동을 죽을 때까지 반복한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스의 신화’다. 많은 사람들이 ‘형벌’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시지프스의 신화 서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가능성의 들판을 끝까지 내달려라(핀다로스-아폴론 축제 경기의 축가3).”

정부는 2022년 6월 약자판기라 불리는 ‘화장투약기’를 규제샌드박스로 지정했다. 규제샌드박스란(sand box)란 신사업이나 기술 등 핵심 선도사업을 일정 기간 규제를 면제해주는 일종의 ‘선허용-후규제’ 방식이다.

화장투약기는 2013년 쓰리알코리아가 개발한 제품이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자판기에 있는 모니터를 통해 약사와 상담 후 증상에 맞는 약을 구매하면 된다.

취급의약품은 ▲해열·진통소염제 ▲진통·진양·수렴·소염제 ▲안과용제 ▲진경제 ▲진해거담제 ▲진토제 ▲정장제 ▲제산제 ▲하제 ▲화농성질환용제 ▲항히스타민제 등 11개 효능군 53개 품목이다.

이때 약사는 판매 전 반드시 화상복약지도와 성명을 반드시 고지해야 하며 전 과정을 녹화해 판매일로부터 6개월간 보관해야 한다. 만일 복약지도를 이행하지 않으면 경고에서 자격정지 등의 처분을 받을 수 있다.

현재 쓰리알코리아의 화상투약기는 6월 30일에 1차 시범사업을 마무리했다. 현재 복지부는 2단계 시범사업를 검토 중이다.

시범사업에 따라 화상투약기는 7곳(▲참약사장수약국(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2062) ▲더나은약국(경기도 시흥시 목감남서로 9-33) ▲영약국(인천시 남동구 인하로 616) ▲성민약국(인천시 부평구 주부토로 262) ▲ 신양곡프라자약국(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양곡로 530) ▲ 대추밭약국(인천시 부평구 길주남로 158) ▲부개온누리약국(인천시 부평구 경인로 1076)에 설치됐다. 그마저도 서울, 인천, 경기권에만 분포돼 있었다.

시민단체들은 안전상비약 품목 확대와 화상투약기 설치 등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대한약사회와 보건복지부는 약의 오남용과 복약지도 등을 이유로 반대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쓰리알코리아는 11년 전 화상투약기를 개발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샌드박스 허가를 받았으며 1차 시범사업을 겨우 마무리했다. 앞으로 쓰리알코리아는 1단계 검토결과를 토대로 약국 규모, 편의성 등을 고려해 실증운영 장소 확대 여부를 검토·승인받아야만 2단계 시범사업을 진행 할 수 있다. 이후 3단계(1년~)에서는 2단계 운영 결과 평가를 통해 추가 확대 여부를 검토·승인을 기다려야 한다. 한마디로 산 넘어 산이다.

도시공유플랫폼의 상황도 비슷하다. 도시공유플랫폼은 2020년 규제샌드박스 실증특례 제도를 통해 상비약자판기 사업 관련 실증 테스트를 신청한 바 있다. 하지만 대한약사회의 반대로 3년째 관련 사업은 특례 심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화상투약기는 이미 해외에서 유효성을 입증한 바 있다. 실제로 미국, 영국, 캐나다, 스웨덴, 중국 등에서는 화상투약기를 진작 도입했으며 그중 일부 국가에서는 일반의약품은 물론 의사의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까지 일정한 검증과정을 거쳐 판매하고 있다.

싱가포르 역시 최근 화상투약기를 공식적으로 선보였다. 싱가포르 정부는 2016년 약자판기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정부가 주도적으로 관련 스타트업과 병원들의 원격진료, 화상투약기 사업을 지원했다. 게다가 올해 초에는 화상투약기 판매 약품을 전문의약품까지 확대했다. 스마트알엑스는 현재 운영 중인 약자판기 5대를 올해 내 50대로 확대할 계획이다.

규제샌드박스를 통한 선허용-후규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기업들에게 감개무량(感慨無量)한 단어다. 하지만 설렘이 좌절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다. 하나의 규제를 뛰어넘으니 직역주의가 판을 친다. 오죽했으면 투자자들은 규제샌드박스 허가를 받은 기업들에 대한 투자를 꺼려할까.

말을 바꿔야겠다. 우리나라에서 규제샌드박스란 ‘시지프스의 일화’가 아닌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 추락한 ‘이카루스의 날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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