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영 교수의 꿀잠비책] 수면은 진화의 산물이다
[정기영 교수의 꿀잠비책] 수면은 진화의 산물이다
  • 정기영 대한수면연구학회 회장(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ㅣ정리·유인선 기자 (ps9014@k-health.com)
  • 승인 2023.09.2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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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영 대한수면연구학회 회장(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

인간은 왜 잠을 자야 할까? 잠은 인간에게 어떤 생존과 번식의 이득을 주는 것일까? 잠을 자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을 비롯해 동물에 대한 수면기능은 아직도 잘 밝혀지지 않았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먼저 진화과정을 살펴보자.

생명체에서 진화의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다.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기능을 가진 생명체는 더 이상 후손을 남길 수 없다. 모든 생명체는 수면 또는 수면과 유사한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화학적 측면에서 수면기능은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생명체의 수면형태가 처음 나타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단순한 생물체에서부터 수면과 관련된 행동이 관측된다. 예를 들어 해파리, 꼬마선충, 초파리에서도 포유류에서는 수면과 비슷한 정지활동이 나타나고 원생동물이나 세균류는 활동성과 비활동성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현상을 보이는데 과학자들은 이를 초기 수면형태로 보고 있다.

진화과정에서 동물들은 수면이 자신들의 생존에 도움이 됐기에 이 기능은 지속적으로 후손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수면 중에는 신체와 신경계의 회복과정이 일어나 위험하고 힘든 환경에서도 길게 버틸 수 있게 된다. 동물들은 연속으로 활동하는 경우 체력 소진으로 인한 피로가 증가하며 결국 사냥감을 잡는 능력이 저하되거나 병에 쉽게 걸린다. 따라서 주기적인 수면을 통해 높은 체력과 기능 수행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됐을 것이다.

인간처럼 높은 지능을 가진 동물에서는 수면 중 학습한 것을 정리하고 기억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포유류나 조류에서는 더욱 발전된 형태의 수면이 관찰되는데 바로 렘수면의 출현이다. 최근에는 파충류에도 원시적인 형태의 렘수면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렘수면의 핵심기능은 대사를 증가시켜 뇌의 온도를 올리는 데 있다. 비렘수면 중에는 뇌의 대사가 감소되면서 뇌의 온도가 내려간다.

해양 포유류인 돌고래와 고래는 뇌 전체가 잠을 자게 되면 물속에서 숨을 쉬지 못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대뇌의 반쪽씩만 잠을 자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이른바 반구수면 (hemispheric sleep)이다. 바다에 서식하는 조류나 장거리를 이동하는 철새 종류는 수천킬로미터를 육지에 착륙하지 않고 비행을 할 때 한쪽 뇌만 수면을 취한다.

반면 물개는 바다와 육지에서 생활하는데 바다에서 생활할 때는 반구수면을 하고 육지에서 생활활 때는 두뇌 전체로 수면을 한다. 돌고래나 물개가 반구수면을 할 때는 렘수면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렘수면의 주요 기능이 뇌의 온도를 올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양한 유형의 수면과 수면과정은 생물들의 생존전략을 증진시키고 각종 생태계에 맞게 진화를 겪으면서 발전해왔다.

지금까지 밝혀진 수면의 기능을 살펴보자. 수면은 에너지를 보존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동물들은 휴식이나 비활동 기간 에너지를 충전하고 생활환경 내 다양한 요인에 적응할 수 있다. 또 수면은 몸의 물리적 회복에 필수적이다. 근육과 조직의 수리 및 성장, 면역시스템의 강화가 수면 중에 이뤄진다.

수면은 지능 발달에 중요한 시간이기도 하다. 낮에 경험하고 학습한 다양한 정보에 대한 기억과정이 강화되며 학습능력이 높아지고 감정 조절 같은 뇌 기능이 활성화된다. 또 수면은 동물들의 인식능력과 경계심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건강한 수면을 통해 동물들은 환경 변화에 빠르게 대응하고 위협을 피하는 데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수면의 진화과정은 동물들의 유전적 결정요소와도 관련 있다. 수면패턴과 전략은 종 내에서 전파되면서 생존에 성공하는 동물들의 특성이 유지될 수 있다.

인간의 수면패턴 또한 진화과정을 통해 변화했다. 초기 인간 조상들은 낮에 활동하고 밤에 휴식을 취하는 패턴을 가졌으며 농경사회로 진화하면서 규칙적인 일과와 수면패턴이 형성됐다.

인간의 수면패턴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마도 전구의 발명일 것이다. 전구가 발명되고 지난 100여년간 인간의 수면시간은 1시간 이상 짧아졌다. 현대사회는 24시간 밝은 사회이다. 스마트폰, 컴퓨터 등 디지털기기 사용과 일과 가정생활의 복잡성, 광범위한 여가생활 등의 영향으로 수면패턴이 변동되며 이로 인해 불규칙한 수면패턴이나 수면부족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기술이 발전하고 삶은 더욱 풍요로워져야 하는데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잠을 적게 자고 항상 잠이 부족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수면은 단순히 휴식만을 위한 시간이 아니라 생명체의 복잡한 기능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속에 담긴 진화의 지혜는 오늘날의 건강한 삶을 이해하고 향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수면의 진화와 기능에 대한 연구는 계속될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 인류 삶의 질을 높이는 방안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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