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영 교수의 꿀잠비책] 밤중에 어디 가?…‘몽유병’ 억지로 깨우진 마세요
[정기영 교수의 꿀잠비책] 밤중에 어디 가?…‘몽유병’ 억지로 깨우진 마세요
  • 정기영 대한수면연구학회 회장(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ㅣ정리·안훈영 기자 (h0ahn@k-health.com)
  • 승인 2024.01.25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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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영 대한수면연구학회 회장(서울대병원 신경과 교수)

영화 ‘잠’을 보면 남자 주인공이 자다 일어나 마치 좀비처럼 몽롱한 상태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냉장고를 열어 아무거나 집어먹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하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자는 장면이 나온다. 이 남자는 밤새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아무 기억이 없다.

프랑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잠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자크 클라인의 엄마 카롤린 클라인이 자다가 깨 몽롱한 상태로 냉동고에서 스테이크를 꺼내 접시에 담는다. 포크를 들고 의자에 앉아 먹으려고 씨름하기도 하고 유리조각을 밟아 발에 피가 흐르고 창문을 열고 지붕으로 나가 그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 다닌다. 역시 다음 날 아침에 아무런 기억을 하지 못한다.

위 두 사례는 수면 중에 반쯤 깨서 돌아다니면서 이상행동을 하고 다음날 기억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몽유병’이라는 수면장애이다. 몽유병은 말 그대로 수면 중에 돌아다니는 수면장애이다. 수면의 가장 큰 특징은 각성에 비해 움직임이 감소하고 특히 깊이 잘 때는 움직임이 거의 없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몽유병환자는 수면 중에 단순히 움직이는 것을 넘어 일어나서 침대를 벗어나 걷는다. 그러면서 뭔가 의식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방문을 열고 돌아다니는 등 다양하고 복잡한 행동을 한다.

움직임은 깨어있을 때보다 다소 느리면서 뭔가 어둔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어디에 부딪히거나 잘 넘어지진 않는다. 눈은 뜨고 있지만 얼굴 앞에 손을 흔들어도 반응은 없다. 이때 깨우려고 자극을 주거나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거의 없고 잘 깨우기가 어렵다.

대부분은 돌아다니다가 스스로 잠자리를 찾아서 다시 자는 것이 일반적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무슨 일을 했는지 거짓말처럼 전혀 또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마치 과음 후 블랙아웃 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몽유병은 꿈을 꾸면서 행동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무의식상태로 좀비처럼 움직이는 것일까? 몽유병 삽화 중에 강제로 깨우면 꿈을 꿨거나 어떤 의미 있는 뇌의 인지활동이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수면다원검사를 해보면 몽유병 시작 시점을 알 수 있는데 대부분 가장 깊은 수면단계인 ‘서파수면단계(N3)’에서 시작된다.

서파수면단계는 느리고 진폭이 큰 델타파가 주로 나오는 수면상태로 깨우기가 가장 어려운 단계이다. 몽유병환자들은 서파수면상태에서 자발적 또는 외적요인에 의해 갑자기 각성이 일어나면서 깨게 되는데 이때 완전각성이 아니라 부분각성이나 부분수면상태, 즉 한마디로 비몽사몽인 상태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렘수면상태에서 깼을 때 생생한 꿈을 회상하는 것과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연구에 의하면 몽유병은 깊은 수면상태에서 뇌의 일부가 깨는 것인데 뇌의 이성적 활동영역인 전전두엽, 기억을 담당하는 변연계 등은 여전히 잠들어 있지만 움직임을 담당하는 운동영역만은 각성상태가 돼 수면상태에서 행동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때문에 반쯤 깨서 움직일 수 있고 다소 복잡한 행동도 하지만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기억중추가 마비돼 있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몽유병은 가족력이 있으며 유전적인 영향이 크다고 생각되고 있다. 위 사례는 성인이지만 사실 몽유병은 어릴 때 잘 나타난다. 나이 들면서 점차 없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일부에서는 성인기까지 이어지면서 사회·법적문제가 되기도 한다. 몽유병 삽화 중에 먹거나 성행위를 시도하거나 집 밖으로 나가 배회하거나 다른 집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운전하는 경우도 있다. 드물지만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 매일 밤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심한 스트레스, 수면부족, 지나친 카페인 섭취, 수면무호흡 같은 수면의 질을 방해하는 요인 등이 있을 때 자주 발생한다. 몽유병 삽화 중에 환자를 강제로 억제하거나 큰소리 등으로 심하게 깨우는 경우 자칫 혼돈상태로 변해 과격해지거나 공포스럽게 느끼는 경우도 있어 함부로 격하게 깨우는 것은 좋지 않다.

몽유병치료는 먼저 앞서 언급한 유발요인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건강한 수면습관을 유지하고 음주, 카페인 과다 섭취 등을 피하는 것이 도움 된다. 약물치료로는 클로나제팜이 거의 유일한 약제인데 몽유병 삽화를 비교적 잘 억제하기는 하지만 근본치료는 아닌 대증적치료이다. 몽유병의 병태생리와 관련 유전자에 대한 연구가 좀 더 많이 돼야 효과적인 치료제가 개발이 될 것이다.

몽유병은 어찌 보면 상당히 드라마틱한 요소가 있어서 스릴러영화의 소재로서 자주 등장하곤 한다. 다시 영화 잠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수면 중 이상행동을 ‘렘수면행동장애’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렘수면행동장애는 주로 노인에서 나타나고 침대를 벗어나 걷고 이상한 행동을 하기보다는 침대에 머물면서 잠꼬대를 많이 하고 때로는 소리를 지르면서 꿈속에서의 행동을 현실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흔들어 깨우면 바로 각성상태로 돌아오면서 당시 꾸고 있던 꿈을 생생하게 회상한다. 영화에서는 두 수면장애를 구분할 수 있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수면전문가의 견해로는 몽유병이 더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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